한 모금의 자욱한 연기 속에 지난날을 잠시 회상해 본다. 인생 항로! 인간 본연의 자세!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달리는 작은 돛단배와 같은 나의 삶 속에 문득 주마등같이 지난 일이 스쳐만 간다. 어느날 나는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기 위하여 안산시에 있는 주민 센터로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때 휠체어에 몸을 싣고 있는 지체장애인 아저씨가 분노의 화신과 동반한 것같이 분노의 얼굴로 주민 센터 여직원에게 무차별하게 많은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 모르는 그 직원의 모습에 나는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웬일일까?” 육신에 장애가 오면 저렇게 정신착란과 같은 정신장애도 같이 올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2년 후 나에게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닥쳐왔다. 이럴 수가.. 내가 시각장애인이 되다니.. 쌍꺼풀과 매력 있는 나의 눈동자에 질투를 느낀 아름다움의 여신이 나의 두 눈을 뺏어갔을까? 아니면 왜 누가 무엇 때문에..
나는 군 생활을 해군에서 7년간을 근무하고 예비역의 명을 받아 27세에 전역하였다. 그리고 전역 후 전자회로를 설계. 개발. 제작하는 엔지니어로 평범한 회사원으로 근무하다가 90년도에 공장 자동화 파트로 자영업을 시작 하게 되었다. 물론 사업에 힘도 들었지만 나름대로 희망의 나래를 펼쳐가고 하루하루를 장식하며 명일의 환희를 향하여 열심히 걷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실명제란 정책으로 인하여 사회에 많은 역기능이 발생하였으며, 그중 한 예로 은행에서 엄청난 검은
돈들이 인출되어 사과궤짝에 숨겨진 상태로 개인들의 지하실 창고에서 숨을 죽이고 잠들어버렸고 사회경제에 많은 혼란이 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많은 업체가 시설 투자를 꺼려하고 정부의 눈치만 보다 보니 공급과 수요의 평행선이 깨질 수밖에 없었고, 당시 현실 속에 많은 업체들이 도산되고 급기야 우리사회는 IMF를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회사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고 나 역시 그 몰아치는 강풍 속에 무기력할 만큼 휘말리게 되었다. 받지 못하는 공사대금과 막아야할 부도수표로 인하여 건강을 관리 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결국 나는 결핵성 늑막염을 앓게 되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자가 치료를 하다 보니 병은 치료가 되지 않고 생명이 위험한 상태로 악화되었다. 하루는 아내가 다니는 교회목사님이 병문안오셨다가 나의 몰골을 보고 당황한채 기도도 못하고
황급히 나를 병원 응급실에 입원 시켰다. 응급실 의사선생님은 나의 눈꺼풀을 까집어 동공을 보더니만 갑자기 긴장되고 서늘한 분위기와 함께 급히 수술소속을 보호자에게 명하였다. 얼마 후 수술은 끝났고 입원실에 입원하니 수술 부위에 통증과 고열로 인한 몸부림과 함께 고통의 밤은 지나가고 고요히 창틀에 스며드는 새벽별의 은은한 미소를 맞게 되었다.
나는 살았다. 비공 속에 스며드는 신선한 새벽 공기 속에 나는 생명에 화려한 꿈길을 걷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쌀죽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데 수간호사가 x-ray 촬영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현상된 필름을 바라보시던 담당의사 선생님이 목덜미를 누르는 지옥의 사자와 같은 목소리로 나에게 아직 폐 뒤쪽에 피고름이 남아 있어 또 다시 수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칼날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 오고 여러 개의 잠자리 눈과 같은 수술대 위에 비쳐지는 수술 등이 강렬하게 나를 녹여버렸다. 녹여진 나의 세포조직은 음습한 검은 구름에 빨려
들어가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매던 나의 혼은 망연자실한 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꼭 이렇게라도 살아야 할까. 운명의 여신은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고통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취가 깬 후에 나는 또 다시 어제와 같은 고통의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두 번의 수술에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에 가슴에는 붕대를 감고 겨드랑이에 매달린 붉은 호스와 호스 끝에 달려 있는 플라스틱 통 속에 검붉은 피고름과
함께 병원 1층 로비에 있는 거울 속에 비쳐지는 나의 모습은 꿈틀 거리는 새로운 생명에 한 줄기 빛이었고 그 한줄기의 빛 속에 작은 삶은 전광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살았다. 나는 또 다시 살았던 것이다. 이제는 입원실에서 수술 부위에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만 남았고 나는 그 힘들고 힘든 치유의 과정을 걷고 있었다. 항상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환자들에게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이제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안정을 취해야 할 나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오고 내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올 줄이야. 나로 인하여 피해를 보고 있는 자재업자와 하청업자들의 색다른 병문안에 엄청난 스트레스로 나를 오늘날의 나로 존재하게 하였던 것이다. 육신의 건강을 잃어 허약해진 나에게 강한 스트레스는 망막 파열로 인한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나는 계속 회사를 운영해야만
했고 점점 진행되는 실명으로 또 다른 시련을 격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동안 책임 있고 성실하게 사업을 운영한 덕분에 거래업체가 신의와 믿음으로 계속 협조하고 도와주어 회사 운영은 점차 정상적인 궤도로 운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럴수가. 그 해 2000년도 11월에 심한 독감과 당뇨로 인해 나는 2차적으로 녹내장을 앓게 되었다. 결국 녹내장으로 인해 시각장애 1급으로 판정받게 되었고 전혀 빛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한 줄기 희미한 빛마저도 모두 떠나버렸고 오로지 나에게 남은 것은 좌절과 절망 그리고 절규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내가 과연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전혀 앞을 보지 못하니 그렇게도 정직하고 신뢰하였던 직원들마저도 서서히 나를 기만하고 거짓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기술 도는 서서히 거래업체에게 신뢰성을 주지 못하고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현장에 직원들을 투입해 놓고 나는 현장 밖에 승용차에서 직원들에게 휴대폰으로 작업을 지시하고 있었다. 휴식 도중 카스테레오의 볼륨을 올려보니 그때 안구기증과 이식수술에 대한 홍보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홍보성의 전화번호에 나는 이식수술에 관하여 문의를 하게 되었다.
안구이식수술이란 안구를 적출하여 다른 사람의 안구 전체를 이식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안구의 앞부분 즉 각막만 도려내고 다른 사람의 각막을 봉합하는 것이 안구이식 수술의 전부라는 것이다. 결국 그 이야기는 나에게 영원히 또 영원히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과 귀여운 두 딸의 모습을 어떤 방법으로도 이제는 또 다시 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달빛 속에 비쳐진 내 마음의 고요한 호수는 누군가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로 인하여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산산이 부서지는 월광은 길 잃은 불나비가 되어 제각기 흩어지니 내 마음의 고요함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신뢰성을 잃은 회사는 점점 어려워지고 급기야 회사를 정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한낱 지푸라기도 잡고싶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앞으로의 생활은 어두운 방구석에서 콜록거리며 한 모금의 담배 연기 속에 자신을 비관하고 또 쓰디 쓴 한 잔 술에 허망한 마음 달래려고 아내와 두 딸에게 술 사오라고 소리치는 비참한 나의 광분한 모습이 파노라마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앞으로 비참해질 나의 자신이 나를 두려움의 공포 속에 빠져들게 하였고 나로 인하여 내 가정에 더 큰 불행과 고통을 주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내 자신을 정리해야만 하고 이 우주 공간 속에 나는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 가치를 잃은 나는 저 차도에 달리는 자동차가 조그만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느껴지고 저 높은 고층건물은 성냥갑같이 낮아져만 가고있는 이때 이 마음 빠져가는 방황의 늪 속에서 헤매고 헤매는데, 저 멀리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이것이 하늘의 음성인가? 아니면 저 깊고 깊은 내 마음 속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소리인가, 나의 자존심은 끓어오른 용암처럼 강렬하게 분출되듯 내 목구멍에서 치솟고 있었다.
나는 존재해야만 하고 육신의 장애를 갖고 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나를 잃으면 또 하나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언가를 얻기위하여 우선 글을 배워야만 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익혀 글을 점자로 쓰고
점자를 눈으로 보는 대신에 손가락 촉각으로 글을 읽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수소문 끝에 강남구 잠실에 있는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을 알게 되어 전화 문의를 하게 되었고 문의 도중 점자 강의료와 교재로가 무료라는 상담원의 대답으로 우리나라에 복지정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점자를 쓰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점자를 손가락 끝으로 감지하여 읽는다는 건 너무 힘들고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3개월간 기초 재활교육을 받는 도중에 복지관을 왕래하는 다른 시각장애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정보에 의하면 시각장애인도 안마와 침술을 배우면 경제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에게는 이것이 실낱같은 희망이요, 등불이었다. 그 후 나는 기초재활교육을 마치고 2001년 3월에 안마와 침을 배우기 위하여 안마사협회 부설기관인 수련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 안마사 자격증을
소지할 수 있는 자격자는 맹학교 고등부 과정 3년을 졸업한 자나 중도 실명자를 위하여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정한 대한안마사협회 부설기관인 수련원 2년 과정을 수료한자에 한하여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안마사의 자격은 시각장애인만 가질 수 있는 시각 장애인만의 독점권이라는 것이다.
나는 안마를 그냥 사람을 주무르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므로 2년이란 교육기간이 너무 긴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교육을 접하니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 전혀 상식에도 없는 해부 생리학, 한방, 임상, 병리, 진단 또는 전기치료 등 너무 어려운 과정을 교육받아야 했다. 교육 과정도 어려웠지만 환경 조건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경기 안산시에 살고 있었는데, 경제가 어려운 탓으로 택시를 이용할 수가 없었기에 전철역으로 혼자서 지팡이를 잡고 더듬거리며 20분간 걸어야만 했고 또 전철을 타고 1시간 30분 이동하다 다시 20분간 도보로 2년간 수련원을 다녀야만 했다. 한여름에 작렬하는
태양 볕 아래 걸음을 걷다 보면 비뚤어지고 말라버린 통나무가 되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도 우산을 쓰지 못하니 물에 빠진 새앙 쥐 꼴이라, 거기에다 한겨울은 살 속을 에며 파고드는 동장군과 불어오는 칼바람에 지팡이를 잡은 손은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이 든 수련과정을 하루하루 흰 지팡이 끝에 자부심을 갖고 내일을 위하여 고요한 밤하늘에 별들의 속삭임과 함께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어느날 나는 주민 센터에서 복지사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관해 상담하다 상당히 분노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앗!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분노하는 나의 모습에 지난 날 주민 센 타 에서 휠체어에 몸을 싣고 분노와 함께 여직원에게 무차별하게 욕설을 퍼부었던 그 아저씨가 생각났다. 육체에 장애가 오면 정신적인 장애도 오는 것일까 하던 그때의 생각이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 날 상담 중에 복지사는 나에게 이 선생님 하면서 존칭어를 사용하였지만 나를 유치원생을 다루듯 무조건 규정!규정이예요 하면서 나의 질문에 그런식으로 무시하듯 했다. 육신의 장애가 있으면 정신의 장애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편견! 그렇다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었다. 여기서 편견으로 인한 예를 몇 가지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일부의 이야기지만 교육을 받는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하여 음식점을 가면 영업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는 음식점도 있었고, 또 어떤 음식점은 내부수리 중이라고 거절하는 음식점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음식점은 돌아서는
우리에게 재수없다고 왕소금을 뿌리는 음식점도 있었다. 어떤 때는 택시를 타기 위하여 택시를 세우면 택시를 세우려다 흰 지팡이를 보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택시도 있었는데, 아마 우리가 저주받은 인간이거나 재 수없는 인간 족속으로 아는가 보다. 아무튼 나도 비장애인 이었을 때 있었던 일이었다. 또 지하철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연명하는 시각장애인들 중 검은 선글라스 속에 검은눈동자를 보고 가짜 시각장애인이라고 생각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바로 나의 미래상이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장애인이 되면 저주를 받은 것이나 재수가 없는 자나 더럽다는 등 정신도 이상해진다는 그 모든 생각에서 오는 잘못된 편견이다. 다만 육신의 장애가 있으면 그 자신이 불편하고 힘들 뿐이므로 재활훈련과 재활교육을 받아야 하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 어느덧 2년이란 힘든 수련 과정을 마치고 나는 2003년도에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희망이 가슴 속에서 용솟음쳤고 바로 눈앞에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가로막혔던 미궁
속에서 빠져나온 나의 모습이 환상처럼 저만치에서 손짓했다. 난 이제 안마사로 보람을 계획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삶이 신성한 것으로 다가와 노동의 땀은 결실의 기쁨으로 영글었다. 한국 땅에 국민의 건강증진과 웰빙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 하며 나는 두 딸의 아빠로서 또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에 가장으로서 하루를 존재하며 흰 지팡이 끝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를 확인하고 변화된 우리 가정에 작은 천국이 건설되리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