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7살 때 우리 집으로 왔다. 아빠의 이복동생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외도로 집 바깥에서 생겨난 또 하나의 생명이었다. 초등학교(당시의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과부가 혼자 애를 키우는 것보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학교에 다니게 하는 게 낫다고 두 집안은 합의하였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엄마가 바뀐 고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두렵고 또 얼마나 서러웠을까. 또 아들 둘만 키우던 할머니에게 갑자기 생긴 딸은 또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짐작컨대 두 사람 모두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집안의 첫 손녀로 내가 태어났다. 고모랑은 꼭 9살 차이였다. 나는 크면서 점점 고모를 언니로 알고 지냈다. 그만큼 고모와 늘 붙어 다녔다. 나를 데리고 개울가로 놀러가는 사람도 고모였고 돌아오는 길에 지친 나를 업어주는 사람도 고모였다. 유치원에서 실수로 바지에 오줌을 싸서 돌아온 날이면, 나는 엄마에게 말하는 대신에 고모를 몰래 불러내 씻겨달라고 하고 빨랫감을 맡기기도 했다.
난 그냥 고모가 좋았다. 언니가 있는 친구가 부럽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로 기억한다.
마당에 쌀 포대를 깔고 엄마 무릎을 베고 잠깐 잠이 들었다. 그야말로 한낮의 풋잠이었다. 엄마와 숙모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와 숙모는 내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우리 집으로 온 게 쟤 입장에서는 잘 된 거지 뭐.”
“그러게요. 그 집에 있었으면 당장 먹는 걱정부터 할 판이 아니었을까요? 그래 한 번씩 엄마 만나러는 간대요?”
나는 그 날 꿈속을 헤매면서도 내가 들었던 말들이 꿈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나에게는 누구에게 말하지도 물어보지도 못 할 비밀이 생겨버린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를 것만 같았던 유치원 시절이었는데 어찌나 그 사실만은 뇌리에 콱 박혔는지. 나는 자라나면서 결코 엄마와 숙모와의 대화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커다란 비밀을 알면서부터 나는 과묵한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고모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고모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아주 똑똑한 우등생으로 말이다. 고등학교를 가야했다. 그러나 오빠들은 중졸이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고모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산업체 학교로 간다고 하였다. 지금은 고모가 왜 그런 학교에 가서 힘들게 공부를 해야 했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만 그때는 단지 고모가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나는 밤을 새워 울었다. 고모와 떨어져 지내야한다는 사실은 어린 나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고모의 3년간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 고모는 집에 잘 오지 않았다. 나는 고모가 너무 보고 싶었다. 소식이 궁금했으나 누구도 나에게 고모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마음속에는 그리움만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내일 고모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그래서 꽃다발사서 모두 함께 고모에게 갈거라고.
그 날 밤은 잠을 설쳤던 것 같다. 소풍을 가는 전날처럼. 서툰 솜씨로 고모에게 편지도 썼다. 졸업을 축하한다고. 그리고 나는 고모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고. 다음 날 우리는 졸업식에 참석하였고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모에게 꽃다발도 전해주었다. 멀리까지 찾아온 나를 고모는 번쩍 안아 올려 뽀뽀하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난 고모는 참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고모를 만나 행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날 풍경이 황량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고모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응당 그러는 것처럼 고모도 졸업 후 공순이(공장에서 근무하는 생산직 노동자)가 되었다. 2교대 생산직이었다. 그래서 고모는 늘 바빴다. 그러다 어느 퇴근 무렵, 고모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정체성을 상실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없는 답답한 자신에게 염증을 느꼈다.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을 버텨내는 것 같은 텁텁한 생활들이었다. 그 순간부터 고모는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당차게 공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였다. 자신의 삶을 언제까지고 어두운 지하의 기계 소음에 묻어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고모는 이듬해 공무원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 누구의 도움없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고모가 첫 출근하던 날, 손수 마련해 주신 옷을 입은 고모를 보고 내 딸 예쁘고 자랑스럽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주셨다.
고모는 나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고모는 월급 40만원을 받던 시절에도 나에게는 10만원짜리 청바지를 사주었다. 그만큼 고모는 나를 귀애했다. 특별한 날이면 시골에 사는 나를 마산으로 불러 돈가스를 사 먹이고 갖고 싶다는 것을 사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또 내가 고등학교 생활에 힘들어 할 때면 편지를 써서 나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세상에 고모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는 없었다. 엄마보다 더 많이 나의 비밀을 공유했고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고모는 그 당시에는 없었던, 지금 유행하는 멘토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람이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자신의 처지 때문에 산업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생각은 꿈도 못 꾸었지만 고모는 정신적으로는 어느 한 곳 모자람이 없는 나의 버팀목이자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해에 고모가 결혼을 했다. 29년동안 마음놓고 응석을 부릴 언덕바지하나 없었던 우리 고모에게 고모부만큼은 영원히 힘이 되는 사람이길 빌었다. 또한 고모의 아픔이 결혼식장에 울려 퍼지는 행진곡에 맞춰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조리 승화되기를. 결혼식장에서 피아노를 치는 내 손가락은 떨렸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나는 악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인생의 굴곡이 있듯 고모의 결혼 후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고모부가 사업을 한다며 나섰다가 결국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빚더미를 떠안은 것이다. 그러나 고모는 지금도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 한 권
제대로 사 줄 수 없다. 멋을 내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것도 사치다. 나도 이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입장에서 그런 고모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한다. 언제고 받은 것을 모두 갚겠다고, 아니 그 두세 배로 갚겠다고 항상 마음은 먹지만 나도 내 가정이 있다 보니 마음만큼 잘 되지 않는다.
고모는 지금 당신의 인생에서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터널의 길이가 얼마만 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부디 그 길이가 짧기만을 바란다. 부디 어서 빨리 나의 고모가 밝은 터널 밖으로 나와 자유로이 달릴 수 있기를... 20대의 고모가 넘치는 패기로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바꾸었던 것처럼 40대의 고모에게도 원숙한 원동력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의 고모이니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나의 고모이니까.
내 나이 서른 넷.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대나무 밭에서 외쳤던 모자장이처럼 나 또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난 이 글을 쓰면서부터 모든 마음의 짐을 털고 내 고모를 더 많이 사랑하고 위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내가 힘들 때 고모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 힘들어하는 고모 옆에 나는 언제까지고 같은 모습으로 있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