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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디딤돌 같은 남자
  • [가족사랑수기 | 201204 | 김미현님] 나의 디딤돌 같은 남자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나만이 느끼는 이 행복한 순간,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나만의 시간을 즐겨본다. 두 부자간이 나간 흔적들이 방안이며 거실 여기 저기 널려져 있는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이 한 잔 의 진한 커피 향에 취해보는 이 시간 지나간 시절들을 떠 올려보았다.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은 96년 4월 장애인의 날이었다. 친정이 추자도 섬이라 늘 집안에서만 살아오던 나는 장애인의 날 봄바람도 쏘일 겸 장애인의 날 행사에 참석을 하였다.
남편은 아는 언니의 차량봉사를 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나와 만나게 되었다. 그 때의 내 나이는 29살 이었고, 남편은 40대 나와 12년 차 띠 동갑이었다. 남편은 나의 활발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는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나의 두 다리의 역할과 나의 디딤돌이 되어주겠다면서 연락이 왔다. 걸음을 걷지 못하는 나는 늘 집안에서만 생활 해 온 탓인지 결혼이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새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평생을 부모님과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내게 남편의 청혼은 큰 두려움과 충격이었다. 남편은 나의 두 다리가 되어주겠다면 추자도 섬까지 와서 부모님께 “미현이의 두 다리 역할도 하며 고생시키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며 무릎을 끊고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남편의 끈질긴 노력으로 부모님은 허락을 하셨고, 그때부터 우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1칸짜리 월세방부터 시작한 우리는 부모님의 도움없이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주 기본적인 몇 개의 살림 도구만 준비해 살다가 하나씩 우리 힘으로 마련해 보기로 생각하고 그때부터 새로운 삶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일을 나가고 나면 혼자 덩그마니 남아 친정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야하는 신혼 생활이 내게는 너무 힘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순간에 나의 몸속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었다. 생명을 잉태했음에도 나 같은 장애아가 태어날까봐 두려움이 먼저 앞섰고, 걷지도 못하는 내가 이 몸으로 기어 다니면서 도저히 아이를 키워 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으로 근심하고 있을 때 남편의 끈질긴 사랑과 격려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아이를 가지면서 몸이 워낙 작아서인지 모든 게 다 힘이 들었다.
더구나 남의 집 셋방살이에 임신을 하고 나니 몸이 무거워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화장실 문제부터 시작해서 욕실과 병원나들이 문제까지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자꾸 남편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면서 짜증만 냈던 것이다.
행복했던 신혼시절은 잠시 뿐 새로운 생명으로 인한 불안과 초조함 그로 인해 힘들었던 시간들이 모든 것이 힘겨운 연속의 시간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대한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는가 싶다. 그 어려운 문제들을 남편이 하나씩 다 해결해 주었고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팔순이 넘은 시어머님까지 오셔서 몸조리도 해주시며 따뜻한 사랑과 함께 잘 살아가라는 격려의 말씀까지 아끼지 않았다.
힘겨운 가운데서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가정과 직장을 위해 늘 성실하게 일하며 늘 웃는 얼굴로 대해 준 남편의 헌신적이 노력이 늘 고맙고 미안하기만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병원도 다녀오고 집안 청소까지도 다 알아서 해줬던 남편. 남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1년이란 세월이란 흘렀다.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므로 마음의 위로가 되고 부자가 된다는 말 들은 적도 있다. 가진 것은 없어도 행복한 사랑을 한 몸에 다 받으니 세상 부러울 게 뭐가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힘들었던 일 언제 지나갔는지 이젠 그 기억도 가물가물 해진다. 힘든 기억은 빨리 잊어지고 행복하고 좋은 순간들은 오래 간다고 했던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부터 가정의 모든 일들이 남편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해내지 못했을 일이었을 것이다. 늘 옆에서 도와준 나의 디딤돌 같은 남자. 늘 나의 옆에서 큰 울타리가 되고 큰 소나무가 되어 주었던 남자.
나의 남편은 첫 봄 눈꽃 같은 벚꽃, 유채꽃, 개나리 등, 온갖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면서부터 시작해서 눈이 오는 겨울까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나에게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들을 선사해 준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색들로 구성된 자연의 신비로움을 선물하는 남자.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지만 늘 웃음을 안겨주는 사람 드라이브를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며 감성이 풍부하여 계절이 변할 때 마다 계절 따라 함께 변하는 사람.
봄이면 가족을 데리고 서귀포로, 한라산으로, 꽃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일요일이면 늦잠도 자지 않고 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채 가시지도 않은 어둠을 뚫고 조용히 고사리를 꺾으러 산으로 향했던 그는 온 몸이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에 피멍이 들었음에도 고사리를 한광주리 들고 들어와 횐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으며 고사리를 내려놓고는 “우리 이것 말려서 장인어른 제사 때 쓰라고 보내주자.” 라며 혼자서 삶고 말리고 한다. 가을이 오면 단풍색깔에 취해 어디든 가 보자며 산업도로로 달리고 바닷가 보이는 해안도로에서 자판기 커피가 맛이 있다며 바다가 보이는 해변 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남편의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남자들보다 멋있고 듬직해 보였다. 겨울이 오면 하얀 눈꽃을 보여주기 위해 보온병에 일회용 커피를 챙겨서 넣어 “산에서 마시는 커피가 제일이야!” 하면서 챙겨주는 착한 남편. 아이를 위해 눈싸움도 해주고 눈썰매도 같이 타주는 자상함까지 보여주는 그는
나의 두 다리가 되어 주겠다며 결혼하자고 하며 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던 약속을 어기지 않고 지켜온 사람. 전혀 걷지 못한 나를 업고 오일시장과 계단이 있는 곳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구석구석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가 있었기에 나는 행복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정의 든든한 가장으로서 튼튼한 기둥이 되어준 멋진 남자. 11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 하나로 늘 나에게 등불이 되어준 사람.
아이에겐 자상한 아빠로 아내에겐 착하고 부드러운 남편으로 1인2역을 열심히 해준 사람. 때론 개구쟁이 같은 곳도 있지만 그런 남편이 옆에 있어 주므로 인해 행복을 꿈꿀 수 있었던 나의 삶 속에서 나는 내가 이 땅에 살아가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비록 장애의 몸으로 정상적인 육신을 가진 이들보다 조금은 어둔하고 불편한 것들이 많으며,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풍족하게 살지는 않지만 마음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넉넉한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늘 말 한다. “우리 가진 것 없어도 지금 이대로 거짓 없이 행복하게 살자.” 나보다 열두 살이나 나이가 많은 남편과 띠 동갑으로 살고 있는 우린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그렇게 변함없이 살아 갈 것이다. 언제나 나의 영원한 동반자로 튼튼한 디딤돌 같은 신념과 믿음으로 나를 지켜주는 남자. 난 그런 나의 남자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