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온 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아니 피하고 싶어 애써 모른 척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식구는 시부모님, 남편, 저, 딸아이 이렇게 다섯 식구였습니다. 방 2개의 작은 집에 다섯 식구가 부대끼며 사는 것도 며느리인 저로서는 참 힘든 일이라 생각했는데, 시동생의 아이들까지 우리 집에 온다는 것은 저에게 ‘불행의 배달’같아 싫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제가 거부한다고 제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련님은 이른 나이에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도 연년생으로 둘이나 있었지요. 참 예쁜 남매이지요. 하지만 잦은 엄마, 아빠의 싸움으로 아이들의 마음에는 상처가 새겨지고 있었나봐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저러다 말겠지, 언제 싸웠냐싶게 회복되겠지 생각했는데 결국 어린 부부는 이혼을 선택하고 여기도 저기도 갈 곳 없는 아이들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아빠는 일을 해야 해서 아이들을 볼 수 없고, 엄마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 하였지요.
그렇게 그 아이들은 어느 날 아침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우리 집으로 정말 ‘배달’ 아닌 ‘배달’이 되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7살 딸아이의 양육,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현실에, 6살, 5살 어린 조카들까지 봐야 한다는 현실이 제게는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말을 잃어갔습니다. 조카들이 미웠습니다. 밥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두 다 밉게만 보였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해야 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래서 저는 화 잘 내고 소리 지르고 무서운 큰엄마가 되어갔습니다. 제가 직장에서 돌아와 제 딸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6살짜리 조카는 슬그머니 다가와 ‘언니’하고 부릅니다. 그때는 조카가 저랑 딸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조카는 그 이야기에 끼고 싶었겠지요. 제가 딸아이를 안아주면 6살 조카는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자신도 안아달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마음이 움직여주지 않으니 안아줄 수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은 그런 저의 행동이 못내 섭섭한지 서운한 눈빛만 보냈습니다. 우리 아이 꾸중하는 건 쉬워도 조카들 꾸중하는 건 눈치가 보여 쉽지 않았지요. 그러고는 밤에 남편에게 하소연하기도 여러 번. 하지만 현실은 변화가 없고 가족 간의 알 수 없는 벽은 높아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만 데리고 소풍을 갔습니다. 김밥이며 과자며 싸서 소풍을 갔는데, 6살 조카가 큰아빠 내리라고 차문을 열어줍니다. 5살짜리 조카도 해맑게 웃으며 뛰어놉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닌데,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친정엄마가 늘 하신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집에서 사랑받지 못하면 나가서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가정은 무한의 사랑을 받고 무한의 사랑을 베푸는 곳입니다. 건강한 가정이 많을수록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이 평범한 진리 앞에 지금의 사회 모습은 참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편부편모 가정의 증가와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해 밖으로 내몰리는 아이들. 어른들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스스로의 무덤인지도 모릅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6살 조카는 혼자서 옷을 개기도 하고 머리도 질끈 묶는 것이 여간 대견하지 않습니다.
5살 조카는 해맑은 웃음이 참 예쁩니다. 고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블록을 잘도 쌓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우리 딸만큼 소중하고 예쁜 아이들이라는 것을.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 딸은 외동 아닌 장녀로 자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생도 잘 챙기고 의젓하다 칭찬하지요. 혼자였으면 누리지 못할 기쁨을 누리고 있는 거지요. 도련님은 한 달에 몇 차례씩 아이들을 보러 오고요. 여전히 방 2칸 작은집에 아이들이 북적북적 거립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웃음이 있어 감사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오늘도 막내는 해맑게 웃으며 받아쓰기 100점 받았다고 공책을 내밉니다. 이 아이들이 건강한 가정에서 자라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아이로 자라길 기도합니다. 그건 우리 부모 된 자의 사명이며 의무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