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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달리자
  • [자원봉사활동수기 | 201501 | 이아름님] 함께 달리자
장애인 휠체어 마라톤 대회 전 날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정오부터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하더니 저녁 무렵에는 장마처럼 비가 쏟아졌다. 그로 인해 오후에 예정되었던 야외 리허설은 취소되었다. 오전에 숙지했던 마라톤 일정과 루트대로 직접 현장에서 진행해 보려던 계획이었다. 아쉬운 대로 행사가 시작될 운동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산을 써도 옷이 다 젖을 만큼 내리는 비가 야속했다.
운동장 입구에 걸린 행사 현수막이 비에 다 젖어 안쓰럽게 걸려있었다. 문득 오전에 통화를 했던 민서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떠올랐다. “쌤. 내일 마라톤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럼. 걱정하지 마. 분명히 비가 그칠 거야.” 민서는 이번 행사에 파트너로서 함께 뛰게 될 중학교 2학년의 어여쁜 학생이었다. 안전, 진행, 행사 등 여러 가지 분야의 스텝 중에 함께 뛰는 보조자로 지원을 해서 만나게 되었다. 아직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하고 전화통화로만 만났지만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상대방도 즐겁게 해주는 매력을 가진 아이였다. 비가 꼭 그쳐서 다음 날 민서를 만나 함께 신나게 뛰고 싶었다. 그날 밤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대회당일 아침, 바람대로 하늘은 맑게 개어 따뜻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서둘러 운동장으로 향했다. 벌써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텝들과 일찍 도착하신 선수들로 운동장은 시끌벅적했다.
민서를 기다리면서 다시 한 번 루트를 확인했다. 대회 시작 30분 전 민서가 어머니와 함께 운동장에 도착했다. 아직 덜 마른 아스팔트 위로 휠체어를 굴리며 운동장으로 들어온 민서는 금방 눈에 띄었다. 흰색 대회 티셔츠와 파란 바지를 입고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 민서야.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 오늘 잘 부탁해.” “안녕하세요. 쌤. 열심히 해볼게요.” 처음 통화했을 때부터 민서는 자연스럽게 쌤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선생님의 줄임말인데 가장 친근한 사람에게 쓰는 호칭이라고 한다. 띠 동갑인 우리에게 적절한 호칭이었다. 어머니와도 인사를 나누고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다. 짧은 개회식이 끝나고 드디어 출발선에 섰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상쾌한 공기가 장애인 휠체어 마라톤 대회의 흥분된 분위기를 한껏 고무시켰다. 민서와 나는 같은 선수 번호를 달고 긴장한 표정으로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민서야. 우리 우승해보자.” “네. 열심히 달려볼게요.” 묵직한 총소리와 함께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청소년부 우승을 목표로 처음부터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승부근성을 발휘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휠체어를 밀면서 달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빨리 달린다고 해도 혼자 뛰는 것보다 느릴 수밖에 없어서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선두로 나서긴 했지만 운동장을 나와 일반 도로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점차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쌤, 우승하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 천천히 가요.” 민서는 어깨를 돌려 팔을 뻗어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턱 밑으로 흐르는 내 땀을 닦아주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버리고 금세 지쳐버린 것이 부끄러웠다.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민서는 “쌤 덕분에 처음으로 빨리 달려봤어요. 이런 게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분이죠? 우리 우승보다 완주를 목표로 해요.”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속도를 줄이니까 뛸 때 느끼지 못했던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민서는 오랜만에 야외에 나와서 활동하는 것과 자동차만 다니는 도로 위를 걷고 있는 이 색다른 경험을 즐거워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전에 다녀왔다는 수학여행 이야기, 중간고사 때 성적이 올라간 이야기, 싫어하는 과목은 수학이고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라는 이야기 등등 오랜만에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서 재밌게 이야기를 들었다. “쌤, 저 무겁지 않아요? 요즘 살이 쪄서 고민이에요.” “아니. 전혀 무겁지 않은데.” 민서가 요즘 부쩍 외모에 신경 쓴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연갈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깔끔하게 묶은 민서의 뒷모습을 보니 얼마나 신경 써서 묶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래 아이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고 흐뭇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반환지점에 다다랐다.
식수대에서 준 음료로 목을 축이고 반환지점을 돌 때였다. “쌤, 걷는 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예상치 못한 질문에 적절한 답을 생각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걷는 기분이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는 걷는다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저는 한 살 때 열이 심하게 난 후로 걷질 못했대요. 그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이번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알아챈 듯 민서가 말을 이었다. 담담하게 장애를 이야기하는 솔직함에 나도 정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사실 걷는다는 기분이 어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구나. 민서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기분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과 같은 걸 거야.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거든.” “그럼 쌤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물론이지. 만성비염이 있어서 냄새를 잘 못 맡아. 다른 사람들도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할 수 없는 게 하나씩은 있어. 그러니까 할 수 없는 걸 극복하려고 고민하는 거지.
지금부터 앞으로 더 많이 생길 고민들의 답을 얻고 싶을 때 질문의 상대가 돼 주고자 마음먹었다.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 뒤로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때 우승을 목표로 한 우리로써 초라한 성적표였지만 우승보다 값진 완주를 이뤄냈다. 빠르다고 모든 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달렸지만 함께 할 수 있었고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결승선에 들어와 서로를 꼭 껴안았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