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3년째 아기가 없어 간절한 기다림이 애타는 마음과 속상함으로 바뀔 때 쯤, 남편은 내게 ‘아기 돌보기’ 자원봉사를 해 보자고 제안했다.
용기를 내서 한 입양기관의 일시보호소의 문을 두드렸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기 돌보는 봉사를 하게 됐다. 국내 입양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외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아기들은 대부분 남자아이들, 장애가 있거나 건강이 좋지 못한 아기들이라 했다.
일시보호소에는 갓 태어난 아기부터 세 돌이 지난 아기까지 10명이 모여 살고 있었다. 아기를 안아보는 것도 처음인 나로서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하고 작은 몸을 품에 안고 연분홍빛 조그만 입술에 젖병을 물리면 오물오물 빨아대는 모습도 신통했고 작은 손발은 너무나 신기해 자꾸만 만져보고 싶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신생아들을 주로 돌봤다.
기저귀 가는 일, 분유를 타서 먹이는 일, 목욕 시키는 일 모든 게 어설펐지만, 하나하나 배워가는 기쁨도 쏠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아를 품에 안아 재우고 있는 내게, 돌쟁이 아기 하나가 아장아장 걸어와서 내 어깨를 짚으며 ‘엄마’라고 했다.
일시보호소의 아기들은 보육사 선생님들은 물론, 자원봉사자들 모두에게 ‘엄마’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에게 전해진 그 단어, ‘엄마’라는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뭉클한 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돌쟁이 아기와 두 살, 세 살인 아기들과 놀아주기 시작했고, 그 아기들과 교감하기 시작했다.
돌이 지난 아기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데도 찾아갈 때마다 뛰어와서 품에 안기고, 음악을 틀어주면 춤을 추고, ‘곰 세 마리’ 노래에 맞춰 율동도 따라했다.
한 번은 빨래바구니에 아기들을 넣어서 끌어줬더니, 매번 그렇게 해 달라고 손을 끌어당겼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대여섯 시간만 함께 하는 부족한 ‘엄마’임에도, 무언가를 가르쳐 놓으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습, 반갑게 매달리는 모습, 헤어질 때면 따라가겠다고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걸어 나오던 모습들은 갈 때마다 가슴에 사무치는 풍경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렇게 아기들과 놀고 나면 눈에 밟히고 자꾸만 떠올라서 남편과의 화제는 끊임없이 아기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오늘 00이, ‘비가 온다’라고 말했어. 걔 이제 문장을 말하기 시작해” “00이는 일주일 사이에 부쩍 큰 것 같더라.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 같은 표정을 지어” “00이는, 내가 입고 오는 옷에 관심이 많은가봐. 아니면 니트 소재가 신기한 건가. 다가와서 내 옷을 한 번씩 만지고 쓸어보고, 내 귀걸이도 만지작거리고 그래” 아기들은 똑같은 환경, 똑같은 보육사 선생님의 손에서 크는데도, 발육 속도는 물론, 식성이며 기질, 캐릭터가 제각각 모두 달랐다.
그 중에서도 식탐이 많고,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찐빵’처럼 생긴 아기 하나가 유독 마음을 끌었다.
다른 아기들에 비해 겁도 많고 순진해서 먼저 남을 공격하는 법이 없고 잘 웃고 낙천적인 아기, ‘도도’
보육사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 아기를 데리고 외출을 나갔다. 대형마트에 데리고 간 날, ‘도도’는 자신의 12개월 평생에 처음 보는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우뚝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한바탕 웃고는 ‘도도’를 카트에 태워 쇼핑을 했다. 마트 점원들과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귀여운 아기’라며 한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누가 봐도 나는 ‘도도’의 엄마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밖에서 ‘도도’와 단둘이 놀고 나니, ‘도도’가 더 사랑스러워졌다. 크리스마스이브엔 외박 신청을 해서 ‘도도’를 집에 데리고 오기도 했다.
모든 ‘어른’들에게 ‘엄마’라고 불러 온 ‘도도’는 남편조차 ‘엄마’라고 불렀기에, ‘아빠’라는 단어를 힘들게, 힘들게 가르쳤다.
일시보호소에서만 생활한 아기라, 바깥 구경을 잘 못한 탓에 처음에는 차에 태우면, 차 시동 거는 소리에도 놀라 울고, 집에 데리고 오면 환경이 낯선지, 내 품에 꼭 안겨서 절대 내려오지 않으려 했었는데...
함께 하는 시간들과 추억이 쌓일수록 ‘도도’도 적응을 해서 이젠 집에 데려오면 아장아장 걸어서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아기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기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아기들은 먹는 음식이 달라지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말귀를 알아듣게 되고, 의사 표현이 다양해져 갔다. 감정도 풍부해져서, 다른 아기들과 함께 있을 때 ‘도도’에게 관심을 보이면 질투가 난 다른 아기는, 내 등 뒤에 와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스케줄이 불규칙한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일주일에 하루, 매번 시간을 지켜 아기들을 만나러 가기도 버거운 상황이었지만, 아기들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이상, 나는 그 시간을 결코 놓칠 수가 없었다.
아기들이 많이 보고 싶은 날엔, 봉사 날이 아닌 날에도 불현듯 찾아갔고, 일주일에 두 번, 많을 땐 세 번씩 갈 때도 허다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꿈같은 시간들....
몸이 지쳐도 힘든 줄도 모르고 아기들의 해맑은 눈동자에 눈을 맞췄고, 새롭게 시작된 아기들의 몸짓과 말과 모습에 홀린 듯이 빠져들곤 했었다. 하지만 그 땐 몰랐다. 그 시간들이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도도’가 두 살이 넘어가던 어느 날, ‘도도’가 덴마크로 떠나게 된다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덴마크 입양이 확정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불시에 이별의 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렇게 깊은 정이 들었는데 어떻게 헤어져야 할 지 일과 시간에도 일이 손에 안 잡혔다. 도도가 좋아하며 율동을 따라하던 동요가 귓가에 맴돌고, 마치 내가 도도의 엄마인 양, 데리고 공원에 다니고 마트에 다니며 놀던 기억들, 함께 크리스마스 케잌에 불을 끄던 시간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이후에도 아픈 이별의 시간들은 연이어 찾아왔다. 아기 중 장애가 있던 아기 하나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태어난 지 세 돌이 다 되어가는 아기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어 그만큼 산 것도 많이 살았다고들 했다.
늘 코에 호스를 꽂고 있었고, 까맣고 큰 눈을 이리 저리 굴리며 살펴보던 그 아기... 몸이 아파 칭얼댐도 잦았던 그 아기는, 솔직히 평소 마음 한 켠으로 귀찮아하곤 했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혼자 자기 침대에 힘없이 앉아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이 떠올라서 내내 마음이 시렸다.
갑자기 친엄마가 마음을 바꿔 먹고 다시 데려가겠다고 해서, 모두가 축복하며 기쁘게 보내줬던 아기가 있는가 하면, 작별 인사도 채 하지 못했는데 지구 반대편 먼 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아기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부족하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배워가는 시간들이었다. 그 입양기관의 사정으로 일시보호소가 문을 닫게 돼, 봉사활동도 끝이 났지만, 나는 내 평생에 ‘엄마’로 살았던 소중한 2년 반의 시간들을 얻었다.
지금도 가끔 한 명 한 명 이름을 되뇌어 보는, 그 아기 천사들....
우리나라에는 없겠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늘 마음으로 그 아기들의 행복을 빌고 있다.
또한 나는 지금 남편과 함께 가슴으로 아기를 낳아 품을 날들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