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살랑살랑 벚꽃잎을 스치며 온통 하얀 봄눈이 휘날리던 어느날 저는 아버지를 다시 만났습니다.‘이원하’라는 성함을 가지신 그 어르신은 오래전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의 모습이셨습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이제부터 제가 일주일에 3번씩 집에 와서 청소도 해드리고 말벗도 해드릴게요. 잘 부탁드려요”라고 첫인사를 올리자 자그마한 체구에 하얀 얼굴, 선한 쌍꺼풀을 가지신 어르신은 연신 웃으시며 처음 방문한 저의 손을 꼭 잡고 “반가워. 우리딸하고 많이 닮았네. 허허허~”라고 하시며 인자한 모습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사실 저의 지난날의 삶은 부족함 없이,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한번 안하고 어떤 목표나 삶의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적당히 살자’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제가 나이가 들어 혼자가 되어 ‘요양보호사’라는 일을 시작하게 되어 어르신들을 만난 후 “아! 이렇게 고독하고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많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어르신댁에 방문해서 지저분한 일을 하고 서비스를 해보니 어르신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은 사라지고, “내가 꼭 이런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라는 좌절도 하고 “아니, 도대체 자식들은 뭐하고 이렇게 노인네들을 혼자 지저분하게 살게 하는거야?” 투덜거리며 일하기를 반복하였지만, 부모와 같이 살지 않고 ‘효도’의 의미가 쇠퇴하고 있는 요즘, 어떻게 보면 ‘요양보호사’가 자식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어 내 부모 모시듯 돌봐드려야겠구나 라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아이고, 바람부는데 왜 나와 계세요?” 버스에서 내리는 저를 보고 어르신은 반가워 손을 흔드십니다. 이제는 제가 오는 날짜, 시간까지 줄줄 외우시고 계시며 저를 기다리십니다.
주1회 ‘차량목욕’이 오는 날에는 저보고 수고하는 목욕팀을 위해 끝나고 먹을 수 있게 맛있는 탕수육과 자장면을 시켜달라고 하셨습니다.
“어르신, 목욕하시고 나서 드시니까 더욱 맛있으시죠? 덕분에 저희도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먹고 싶은거 있음 언제든 말해. 다음에는 더 맛있는거 사줄게!”
저뿐만 아니라 목욕팀까지도 세세하게 챙겨주시는 어르신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식들이 멀리서 오면 맛있는거 먹이고 싶어 하시는 ‘부모’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르신 역시 큰딸은 대구에 살고 아들도 타 지역에 살고 있어 자주 볼 수 없다며 아쉬워 하셨으나, 그나마 자식들이 생활비를 넉넉히 드리고 있어 돈에 대한 부족함은 없으셨습니다.
어르신은 비록 전립선암을 선고 받으셨지만, 비교적 보행하시는 것은 큰 지장이 없어서 저랑 같이 이곳 저곳을 다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과 참 많은 추억이 있었습니다.
동학사에 벚꽃 놀이를 가서 맛있는 파전에 막걸리를 먹었고, 고복저수지에 가서 장어도 먹었습니다. 또 조치원에서 하는 복숭아 축제에 같이 동행하여 복숭아깎기 대회에서 1등을 해서 선물세트도 받았습니다.
맛있는 복숭아를 드시며 “달다, 맛있다”하시던 어르신의 모습은 마치 5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였습니다.
한번은 어르신과 시장을 볼 때였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따님이신가봐요?”라고 물으면 당당히 “내 애인이여”라고 농담을 하시며 저랑 다니시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시기도 했습니다.
비록 차편이 불편해서 ‘택시’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어르신은 “죽으면 돈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니고 더 아프기 전에 좋은데 열심히 구경가고 맛있는 것 먹어야지”라며 당신을 위해 돈쓰는 것에 아까워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어르신들을 보아왔는데, 거의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당신들은 못먹고 못입고 하시며 모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못된 자식들에게 빼앗기거나,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걸 볼 때 우리 어르신은 참 현명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노인’하면 그저 느리고 고집스럽고 할 일 없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껴지나 봅니다.
어르신이 살고 계신 집 옆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어 어르신이 이쁘다고 쓰다듬으셨는데 그 엄마가 어르신을 오해해서 ‘성추행’을 했다고 고소를 했습니다. 참 무서운 세상입니다.
곁에서 어르신을 봐온 저로서는 어르신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여나 자식들이 알면 일이 더 커질까봐 어르신은 그냥 항변도 못하고 집행유예 2년을 받았습니다.
나이 80이 넘어 성추행범이 된 어르신은 연세가 있으셔서 1달에 1번씩 법원출두 하는 것으로 마무리는 되었으나, 제가 어르신을 모시고 법원에 출석할 때마다 저도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아이엄마만의 잘못은 아니겠지요. 바로 이 사회가 안타깝게 변하고 있는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고 하지요? 하지만 저도 어르신과의 만남을 통해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어르신도 저의 권유로 몇십년 동안 피우시던 담배를 끊으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요양보호사를 떠나 마치 딸처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라는 말처럼 어르신도 몸이 점점 쇠약해지셔서 결국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입원을 하셨어도 정신만은 또렷하시어 저를 보고는 “영희야, 나 이제 화요일이면 저 세상으로 갈거 같아. 소원이 있으면 뭔지 말해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제 소원은 남은 인생 건강하게 사는거에요”라고 말씀드리자 어르신은 “그래 내가 저 세상가서 우리 영희 건강하게 살다가 오라고 빌어줄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어르신은 말씀대로 그 다음주에 편안히 주무시다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어르신을 만난지 4년만에 그렇게 이별을 하게 되고 마지막까지 곁에서 임종을 지키지 못해 저는 못내 죄송한 생각뿐이었고, 친정아버지가 돌아 가신것 처럼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르신과 친정아버지 두 분 다 88세로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마도 저 세상에서 만나서 오순도순 친구가 되셨을 거라 저 스스로를 위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저에게 선물도 남겨주셨습니다.
자제분들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꼭 친딸 같았던 권여사에게 마지막 용돈을 주고 싶다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저는 끝까지 저를 생각해 주신 어르신이 떠올라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어르신과의 만남과 이별은 제 자신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습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먹기 달렸다는 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도 ‘요양보호사’일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풀 한포기, 동물, 사람이건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지요.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는 구절처럼 저도 앞으로 모든 어르신들의 연탄이 되어서 살아가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요양보호사로서의 ‘의무’보다는 ‘사랑’으로 누구에게나 기꺼이 연탄 한장이 되어 남은 인생을 뜨겁게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르신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르신! 저 세상에서는 더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하세요. 저도 함께 있는 동안 행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