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일어나! 지금~ 당장!”
자명종이 소리를 질렀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인 희철이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지훈이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매일 오늘 같으면 좋겠다. 학교가라고 깨울 때는 엉덩이를 때려도 안 일어나더니 봉사하는 날은 아주 오뚝이처럼 벌떡이네~”
엄마는 핀잔을 주는 말투였지만,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희철이에게 주스를 내밀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니까요! 히힛”
희철이는 주스를 받아 책상위에 놓으며 씽긋 웃었다.
희철이가 청소년 봉사단 활동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였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과학 동아리를 만들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실험하네, 자연을 살리네, 연구하네 난리법석을 떨었던 희철이다.
봄에는 벌에 쏘이기도 하고 겨울에는 하천에 빠져서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친구들은 매주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쳐서 떨어져 나갔고, 이제 5명의 의리남들만이 남아 “나비효과” 과학 동아리를 지켜가고 있다.
누구는 ‘독수리 5형제 동아리’로 이름을 바꾸라고도 했다. 하지만 작은 날개짓이 큰 파장을 일으키듯 자신들의 작은 힘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가길 희망하며, 희철이는 나비효과 이름을 지켜냈다.
희철이와 친구들은 작년에 우연히 시민의 날 행사에 과학실험부스로 참여했다가 지훈이라는 아이를 알게 되었다. 지훈이는 현재 초등학교 3학년생이다. 물론 처음 인연을 맺은 작년에는 2학년이었다.
“자~ 여기를 보세요. 이게 바로 환경을 살리는 재활용 정수기입니다. 깨끗한 물을 먹고 싶으시다면 저희에게 오셔서 실험해보세요!”
희철이는 평소에 말도 잘 안하고 반응도 없는 시크남이지만 목표가 생기면 제법 너스레를 잘 떨어 ‘유멜레온이’이라고 불린다. 그때 그때 카멜레온처럼 잘 변한다고 언어의 마술사(언마)란 별명을 가진 동아리 친구 기용이가 붙여준 별명이다. 현수도 그 별명이 싫지 않았고, 그날부터 희철이란 이름보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멜레온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희철이가 과학부스 앞에서 이렇게 홈쇼핑 광고 속에 나오는 아저씨처럼 계속 떠드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로 재활용정수기 원리를 설명했고, 직접 정수기를 만들어가려는 사람들로 희철이네 부스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희철이의 바지를 여러 번 잡아당겼다. 희철이는 정수기 만드는 일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작고 몹시 마른 아이였다.
“왜 그러니?” 희철이가 물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눈이 크고 맑은 그 꼬마아이는 무척 귀여웠다. 아이는 희철이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너도 이거 만들거니?”
희철이가 재활용정수기를 들어서 보여주자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 저기 .. 형아? 저기 있는 저거 내가 가져가도 돼?”
꼬마가 손가락으로 천막 뒤쪽을 가리키며 수줍게 말했다. 꼬마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 쪽에는 오늘 준비물을 담아 가져온 빈 박스들이 서너개 엉켜있었다.
“아, 저거 ~ 응. 괜찮아! 그런데 뭐하려구?” 희철이는 아이가 이 박스로 무엇을 만들려고 하나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꼬마는 다시 손가락으로 공설운동장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우리 할아버지 갖다 드리려고!”
꼬마는 자기 할아버지에게 박스를 가져다주려고 한 것이다.
희철이는 그런 꼬마가 귀엽기도 하고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박스를 할아버지가 있다는 곳까지 들어다 주었다.
계절을 잊은 것 같이 두툼한 점퍼를 걸친 허름한 옷차림의 할아버지가 인력거 앞에 걸터앉아 졸고 계셨다.
“할아버지~!”꼬마는 깃털처럼 가볍게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에~~ 우,, 이,, 지,, 후,,이 와구~아,,”
흠칫 놀라 깬 할아버지는 어눌한 말투로 꼬마를 지훈이라고 부르며 반갑게 안았다.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는 다리를 하나 절고 계셨다.
“ 형아, 우리 할아버지 완전 힘 세! 박스를 이 만큼 쌓아도 다 끌어!“
지훈이는 신나게 할아버지를 자랑했다. 희철이는 갑자기 무언가가 목에 올라오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일단 박스를 할아버지의 인력거에 실어드리며 혹시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치셨는지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지훈이가 냉큼 대답했다.
“우리 할아버지 뇌출혈 이야! 그래서 말을 잘 못해.”
“그렇구나! 그럼, 부모님은 집에 계셔?” 희철이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몰라, 난 할아버지랑 아기 때부터 살아서.. 엄마, 아빠 없어!” 지훈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희철이는 생각지도 못한 지훈이의 말에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지훈아, 내가 또 뭐 도와줄까?” 희철이가 물었다..
“응~ 형아. 박스가 많이 있으면 할아버지가 웃으셔. 그래서 박스가 많이 있으면 좋겠어. 그쵸? 할아버지!”
지훈이가 할아버지를 올려다 보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으셨다. 할아버지의 앞니는 몇 개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앞니 빠진 지훈이랑 많이 닮아 보였다.
“그래? 그럼 형 따라와봐~!”
희철이는 무언인가 생각난 듯 지훈이를 데리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각 부스마다 다니면서 박스를 모으기 시작했다. 빈 박스를 더 만들기위해 비어 있지 않은 박스는 손수 비워주기까지 했다. 친구들도 상황을 듣고는 따라와 도와주었다.
금방 인력거가 한가득 박스로 차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하며 고개를 계속 끄덕이며 연신 웃으셨다. 인력거가 가득해지자 할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박스를 인력거에 꼭꼭 묶으셨다. 도와드린다고 하니 손사래를 치시며 괜찮다고 했다.
“와~ 오늘이 제일 많다! 거봐. 할아버지 내가 여기 가자고 했잖아. 히히!”
지훈이는 신이나서 인력거 주변을 왔다갔다 하며 박수를 쳤다. 꼭 아기 침팬지 같았다. 그 모습에 희철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사코 괜찮다는 할아버지의 인력거를 희철이와 친구들이 밀고 지훈이네 집으로 갔다. 집은 공설운동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허름한 주택가였다. 방 하나에 부엌하나가 전부였다. 주인집 말을 들으니 지훈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렇게 할아버지를 따라 종이를 주우러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2번은 지역아동센터에 나가 공부를 한다고 했다.
“지훈아, 넌 뭐가 제일 재미있어? 아니면 하고 싶은 거 있어?”
지훈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였다.
“나 과학 좋아해. 과학 좋아하면 의사가 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어. 나 의사가 되어서 할아버지 병 낫게 해 줄거야!” 지훈이의 말에 희철이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희철이 할아버지도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희철이는 지훈이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친구들과 지훈이가 다니는 지역아동센터에 과학 실험반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친구들과 실험 도구를 가득 들고 지역아동센터 문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일 먼저 지훈이가 뛰어나와 희철이에게 안겼다.
“형아! 이거!”
지훈이는 주먹을 내밀었다. 내게 어서 손을 펼치라고 귓속말을 했다.
희철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에 따스한 초콜릿 하나가 놓였다. 살짝 녹아 있는 그 초콜릿을 보며 희철이가 말했다.
“고마워 지훈아! 이거 정말 형 먹어?”
“응~ 그거 형 거야!”
지훈이는 해맑게 웃었다. 희철이의 손을 꽉 잡은 지훈이는 할아버지 인력거 주변을 돌때처럼 신나는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계단을 올라갔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희철이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초콜릿 어제 간식시간에 받은건데 초콜릿을 제일 좋아하면서도 형오면 준다고 주머니에 넣고 다닌거야. 아까 1시간 전부터 형아 기다리고 있었어!”
희철이는 다시 초콜릿을 펴보았다. 다 녹아서 형체가 사라졌지만, 지훈이의 따스한 마음이 희철이의 가슴을 녹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