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센터

  • 멀리서 올 편지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506 | 김혜란님] 멀리서 올 편지
매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5년 전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몇 달 앞둔 중요한 시기에, 친구와 우연히 시청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노동자 한글 교실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말에 한 번 2시간씩 하는 한글 수업은 수능을 앞둔 저희에게 큰 부담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스리랑카에서 온 ‘아누르’라는 청년을 맡게 되었습니다. 까만 피부와 큰 눈을 가진 마른 체형의 아누르는 수줍음이 많았습니다. 곧 첫 수업이 시작되고, 한국 생활의 어려운 점이 없는지 질문했더니, 곧바로 공책에 천천히 바나나 한 송이를 그리며 아누르는 입을 뗐습니다. 한국 물가 너무 비싸요. 한국 바나나 한 송이 2000원, 그러나 스리랑카 바나나 한 나무에 2000원.” 바나나 나무까지 그려가며 한국 물가가 비싸다며 계속 고민을 토로하는 아누르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습니다. 계속해서 스리랑카는 어떤 곳인지 궁금해 물었더니, 공책에 보트와 코끼리를 그리며 설명해주었습니다. 아누르는 스리랑카는 한 마디로 아주 작고 예쁜 나라라고 했습니다. 평소 학교 수업이 없을 때는 친구들과 근처 물가에 가서 작은 배를 타고 나가기도 하고, 코끼리를 타며 놀았다고 했습니다. 아누르의 행복해 하는 표정과 말투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스리랑카라는 나라가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 곳일지 상상했습니다. 이내 공책은 우리들의 낙서장이 되어 버렸지만, 책보다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고민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수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수업이 끝나 아쉬울 때쯤, 아누르가 갑자기 저희 집 주소를 물어봤습니다. 당황 한 나머지 동, 호수를 빼고 아파트 이름만 적어 줬더니 아누르가 “뒤에 숫자없어요?” 하길래 그때서야 동, 호수를 급하게 적어 주었습니다. 완벽한 주소를 받아 든 아누르는 밝은 목소리로 “선생님, 편지할게요.”라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편지를 써 준다니, 이렇게나 순수한 사람에게 잠깐이나마 나쁜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반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몇 주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일상 고민들을 털어놓으며 어느새 학생, 선생님 신분이 아니라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아누르가 한국 음식 중 김치를 좋아한다던 말이 생각나 친구와 함께 김치전을 만들어 도시락을 선물했더니, 그 다음 주에 돌려받은 빈 도시락 안에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스리랑카 음식이라며 직접 만든 스리랑카식 빵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를 생각하며 정성스레 만들었을 마음이 느껴져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수능이 몇 주 남지 않았을 때, 한국의 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아누르에게 투정 부렸더니 진심으로 걱정해 주며 그날 새 필통과 볼펜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본인은 공책 한 장, 연필 한 자루도 아껴 쓰는 데 그 마음에 감동받았고 괜한 투정을 부린 게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싼 선물은 아니었지만, 아누르의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응원해주는 마음이 느껴져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코 앞에 다가오고 크리스마스에 열릴 편지 낭송 대회를 연습하는 날이었습니다. 큰 상품이 걸려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저마다 갈고 닦으며 배운 한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뽐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연습에 집중했습니다.
아누르는 처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준비해 온 편지를 읽으며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보다 건강하게 잘 있다며, 보낸 돈은 부족하지 않느냐며 지우개로 몇 번이고 지웠다 반복하며 쓴 편지는 문법도 단어도 다 틀린 서툰 편지였지만, 부모님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완벽한 편지였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대학도 나오고 컴퓨터 수리공으로 안정적으로 일했다던 아누르는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시면서 생계를 책임지게 되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낯선 시선과 차별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조금씩 모아 고국으로 보낸 돈으로 누나가 시집을 가게 됐다며 기뻐했습니다. 아누르는 편지를 읽는 내내 눈가가 촉촉해졌고 지켜보는 제 마음도 울려버렸습니다. 아누르는 낭송 연습을 하며 제가 눈앞에 있으면 떨지 않고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크리스마스날 꼭 와 달라며 부탁했습니다. 저는 꼭 가서 너를 응원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고, 분주하게 편지 낭송 연습을 하는 외국인들 사이로 아누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편지낭송대회가 시작되고 설마하는 마음으로 모든 순서를 지켜봤지만, 아누르는 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안 사실은 아누르가 비자 문제로 3일 전 급하게 한국을 떠나, 고향을 돌아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복지관 선생님께서는 비자가 안정적이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흔하게 생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누르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스리랑카가 어떤 곳인지 늘 궁금해 하던 저를 위해 예쁜 스리랑카 사진들을 모아 보여주며 다음에 꼭 같이 가자며 약속도 했었는데, 수업을 하기 전이면 늘 내 눈을 바라보며 오늘 기분 상태를 먼저 물어보던 착한 아누르는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나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던 아누르의 까맣게 반짝이던 큰 눈망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도 가끔 길을 가다 외국인 노동자분들을 보면 당시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배웠던 그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외국인 노동자 분들을 마주치기도 싫어했던 철 없던 시절에서 지금은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살아 온 문화와 환경이 다를 뿐 똑같은 사람이라고, 어쩌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오늘 하루는 강남 간 제비가 봄 소식을 물고 오기 전, 많은 것들을 남겨 둔 채 가야 했던 아누르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