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님, 우리 자손들은 언제 와유? 못 본지 한참 된거같은데...”
“이봐,선생, 우리 자쓱들은 다 살아있소? 우째 요로코롬 보고잡은지..근디 보이지도 않고 내 생각에 다 죽었는가비네, 어짜면 좋긋소”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약속이나 하신 듯 어르신들께서 한두분씩 앞다투어 자식들을 찾으셨다.
매일 오늘 날짜가 언제며 시간이 몇시인지 반복되는 나의 질문에도 허허허 웃으시며 오답을 정답인 듯 확신에 차 말하시던 어르신들께서 명절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한번에 알고 계셨다. 지금 자신의 나이가 얼마나 드셨는지, 때론 본인의 이름조차 희미해지신 어르신들의 기억 속 소용돌이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단 하나의 존재, 그게 바로 ‘자식’이라는걸 아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십여년 전, 대학을 졸업하며 치료사로서 재활에 대한 큰 꿈도 있었고 신체적인 장애보다 마음속의 상처까지 어루어 만져드리겠노라 다짐하며 작업치료사로 첫발을 내딛었던 나였었다.
하지만 재활병원생활에서 치료사로 지내온 10년이란 세월은 나를 병원수익에 비례해 환자를 평가하고 대하는 냉정한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나의 친절도, 웃음도 내 마음속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나온것이라 내가 원하던 일을 하고 있었으나 행복할 수 없었고 웃고는 있으나 그 웃음은 나를 즐겁게 하지는 못하는 힘든 날들의 연속이였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잠깐의 공백을 가지고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전 내가 과연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입사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한 기억이 있었던 요양원이란 곳이다. 하지만 내가 다시 요양원은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복지’라는 그 이름 앞에 그 어떤 대가나 조건을 붙이지않고 오롯이 사람으로써 사람을 대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분명 달랐다. 이전처럼 무엇을 할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어르신들과 ‘함께’해드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복지’의 시작이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함께’는 한편으론 ‘나눔’이라 생각했다.
나는 요양원이란 제한된 공간에서 매일매일 반복적인 생활과 혼자라는 고립감,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제 남은건 죽는일 뿐이라며 낮게 읊조리시던 어르신들의 그 눈빛은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머리 속에 선명하다.
나는 어르신들께 매일 같은 일상이지만 그 일상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다.
이곳에 온 뒤로 계절이 3번 바뀌었고 어느덧 설날이 되었다. 설이 되자 요양원의 분위기는 더 극명하게 나눠졌다. 가족들이 찾아오시는 분과 찾아오시지 않는 분들로 인해 반가움의 눈물과 서운함의 눈물이 공존하는 시간들이 지켜보는 나 역시 많은 감정들이 내 마음에 오갔다.
명절 프로그램으로 만두빚기도 하고 민요교실도 했지만 어르신들의 마음깊은 곳에서 오는 그리움과 그 외로움을 다 채워드리진 못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잠깐 누워보세요. 제가 얼굴에 팩 붙여 드릴께요”
나는 사물함에 있던 천 원짜리 마스크 팩 몇 개를 챙겨들고 방에만 누워계시던 어르신들의 방에 찾아들어갔다.
“에이, 됐어. 다 늙어서 쭈그러지고 볼품없는데 그거 붙여서 뭐해? 젊은 사람들이나 더 하고 더 이뻐져. 이제 죽을날 받아놓은 사람들 해봤자 소용없어. 허허허”
“돌아가실땐 돌아가시더라도 이왕이면 이쁘게 하고 가야죠~ 그래야 저승 가서도 이쁨 받죠. 하하. 그러니까 할머니 잠깐 누워보세요”
“에이, 거참 안해도 된다는데...”
마지못해 누우시는 듯 했으나 내 손에 들려있는 팩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아신 순간부터 할머니 얼굴에선 미소가 가시질 않고 계셨다.
“요거 20분만 붙이고 계시면 되요. 할머니”
“그래? 그럼 이왕 하는거 여기 이마에 좀 더 잘 붙여놔봐. 주름 좀 펴지게. 허허허”
20분이 지나고 나는 팩을 떼어 드리고 크림을 발라드렸다.
“우와, 할머니. 얼굴에서 광이 나서 밤에 불 안켜도 될거 같아요. 하하하”
“그래봤자 쭈그랑 늙은이지 뭐”
평소에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던 할머니셨다. 프로그램 할 때마다 권해드려도 ‘됐어’로 단호하게 벽을 쌓으시며 ‘죽을날’만 얘기하시던 할머니께서 말씀드리지 않았는데도 보조기를 밀며 혼자 거실로 나가셨다. 그리곤 괜히 사람들있는 곳으로 가서 한 바퀴 크게 도셨다.
“어머, 어르신. 얼굴이 광이 나요! 십년은 젊어보이세요.”“어르신, 어떻게 오늘은 피부가 젊은 저보다 더 좋아요? 아이고 부러워라”어르신을 본 직원분들이 어르신께 한마디씩 드렸다.“십년 더 젊어보이면 어떡해? 그럼 십년 더 살아라고? 허허허”매일 죽는날만 세며 방에서 나오시지 않던 어르신을 밖으로 나오게 하고, 죽음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던 어르신께 살아감을 생각하게 만든건 그 어떤 것도 아닌 천원짜리 팩 한 장이였다.
“나이들고 몸이 아프다고 좋은것도 모르고 사는거 아녀. 젊은 시절엔 자식들 키우며 먹고 살기 바빠서 하루하루가 그냥 숨만 붙어 살아왔지. 이런 호사를 이곳에서 선상한테 다 받아보네. 고맙소. 선생. 내 저승에 가서도 안 잊을께, 절대 안잊어. 고맙소, 정말 고맙소”
연신 ‘고맙소’를 말하시는 어르신께 천원짜리 팩 한 장은 평생 타인을 위해서만 살아온 자신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였고 죽어서도 가져가고 싶으신 ‘호사로운’ 기억이셨다.
설이 지나고 매섭기만 하던 겨울 바람속에서도 또 다시 봄은 왔다.우리가 기다리던, 기다리지 않던 봄은 오고 또 어느덧 떠나가고, 꽃은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모습은 달라져 있어도 와야 할 그 시간에 약속한 듯 오고 있어야하는 그 자리에 늘 서 있다.
살아평생을 자식들 위해 살아온 어르신들은 이제 세월에 흔들려 가지만 남은 고목나무가 된 지금도 그 자리에서 자식들 걱정만 하고 계신다.
그날 큰소리내며 웃으시던 어르신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행복은 단순히 ‘나눔’이라 생각했던 내게 ‘호사로운’ 천원짜리 팩 한 장은 내가 나누어드리고자 하는 행복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그로 인해 내가 더 행복해지는 ‘곱하기’ 라는걸 깨닫게 해주었다. 어르신들께서 더 많은 ‘호사로운’기억들을 추억하며 지내실 수 있게 나는 오늘도, 내일도 ‘행복곱하기’를 위해 ‘행복나누기’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