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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장애가족의 행복날개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508 | 마경숙님] 우리는 장애가족의 행복날개
장애가 있다는 것, 그것은 내 삶의 절망이었습니다. 10개월 동안 애지중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종한 아이가 보통의 아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기분은 장애 가족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통함이었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는 것일까, 수 없이 현실을 부정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암환자나 불치의 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심리적인 상태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부정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해 분노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포기하거나 절망하다 결국 상황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듯 나 역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내 슬픔과 절망의 시간은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딸 은영이의 해맑은 웃음과 애교는 의미 없는 눈물을 거두게 하고 절망으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곧 은영이가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지요.
벌써 10년이 되어버린 자원봉사활동의 시작은 은영이를 위해 치료나 재활 운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자원봉사라기보다는 재활기관에 함께 방문하여 못미더운 은영이 활동을 돕는 것에 불과 했지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순수하게 자원봉사라기보다는 부족한 내 아이가 혹시라도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피해를 당할까 염려 되어 장애아동의 부모로서 괜한 죄책감이나 자격지심에 돕는 활동을 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참 어설픈 기우였답니다.
시골의 작은 학교는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게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잘 어울렸기에 염려는 조금씩 희망과 기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엄마 안녕!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도 씩씩하게 잘 하면서 점점 학교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그럴 때면 속으로는 불안해서 온갖 걱정 하면서도 “그래 우리 은영이 잘 할 수 있지? 안아주면서 잘 다녀와” 답해주고 혹시나 하는 염려로 은영이 몰래 뒤를 따라 가면서 교실에 들어가는걸 보고야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영이를 위해서도 엄마가 더 당당하게 서야한다고 생각해 은영이에 대한 관심을 이제 조금씩 지역사회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영이가 보통의 사람들과 함께 보통의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아름다운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부터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미용실을 운영하였기에 한 달에 한 두 차례 쉬는 날이면 은영이와 함께 요양원 미용봉사를 나섰습니다. 요양원에 가면 어르신들에게 귀여움 받는 것이 좋은지 잘 따라다녔습니다. 주말에는 “엄마 오늘 할머니 집 가요” 라고 먼저 말할 때도 있지만 요양원을 할머니 집이라고 말하는 아이는 우리가 하는 활동이 무엇인지 의미는 당연히 알지 못했지요. 단지 외출한다는 것,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봉사활동 하다가 아이가 커가면서 전문적인 교육을 위해 도시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안 은영이는 도시에 적응하느라 무척 힘들어 했는데 낯선 도시와 새로운 사람들에 적응하는 것은 엄마에게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엄마, 할머니 집 왜 안 가?” 하며 더 재촉하듯 습관처럼 미용봉사 도구를 챙기곤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새로운 곳에 봉사활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어디로 갈 것인데 찾아보게 되었어요. 이젠 요양원 대신에 은영이처럼 지적장애인이 활동하고 있는 주간보호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답니다. 그때 그때 이미용 서비스가 필요한 분들에게 수시로 이미용 서비스를 하였고 프로그램 업무 보조가 필요할 때는 프로그램 지원도 하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봉사활동도 전문적으로 하면 좋겠다싶어 사회복지 공부를 하게 되었답니다. 장애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공부가 필요해보였어요.
은영이에게도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은영이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간보호센터에 가서 그곳의 이용자들과 친하게 지냈고 도시 문화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사회성도 많이 좋아졌어요. 주간보호센터에서 내 손길이 필요한 일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도왔던 봉사활동의 시간이 10여년이 지나다보니 이제는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서 하게 되었어요. 엄마의 이미용 기술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들 녀석이 미용을 전공하게 되었네요. 그래서 제가 했던 이미용 봉사를 이제 아들이 맡아서 하겠다며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바쁜 시간들을 보면서 아들은 이미용 봉사로 엄마를 돕고 은영이는 엄마의 프로그램 보조를 하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족봉사대의 탄생이 된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열심히 봉사활동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긍정의 에너지를 지원하고 있기에 힘을 내서 봉사활동 한답니다. 주말이나 휴일에 봉사활동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자신의 휴식 시간을 할애해 차량 지원을 해주고 있지요.
집에서 아이만 바라볼 때는 이 아이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걱정만 하던 생활이었는데, 거의 매일 저 혼자 또는 아이와 함께 자원봉사를 하다 보니 오히려 봉사활동을 통해 긍정의 에너지를 받았고 자원봉사 손길이 닿는 순수하고 천사 같은 대상자로 인해 밝고 건강한 사회의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 대상자들과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눈빛만 봐도 서로 소통이 될 수 있을 만큼 절친한 친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원봉사란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귀한 기회가 되어 참 행복합니다. 그리고 자원봉사를 통해 내 재능을 나누었다기보다는 건강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장애인복지에 대해 공부도 되었으며 다양하게 오히려 내게 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애인복지 공부를 하면서 장애인복지의 완성은 장애인에게도 그 나이와 성장과정의 생애 주기에 맞는 서비스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배웠답니다. 그러나 현실은 장애인의 욕구에 충족한 서비스는 여러 가지 사회적 여건으로 힘들어만 보이네요. 특히 장애인들도 일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많은데 마땅히 능력에 맞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적절하게 없다는 것입니다.
정책적으로나 예산 등에 있어서 장애인의 눈높이나 욕구에 맞춰 서비스가 지원되지 않을 때, 장애인이 실망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많았고 장애가족의 부양에 대한 부담감으로 가족들의 힘든 상황을 바라봐야 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여전하게 자원봉사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은 기능이 필요하다면 꾸준하게 공부하는 역할도 할 생각이에요.
아울러 장애인 일자리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사회적기업 업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고 현재 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주간보호센터 프로그램 지원과 직업재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이용자들을 돕고 싶습니다. 또한 주변의 지인이나 학생들에게도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봉사활동의 행복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봉사활동에 대한 홍보도 할 생각입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함께 손잡고 나아가겠습니다. 자원봉사는 자기 스스로 이타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봉사활동의 긍정 에너지가 되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