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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버지의 소원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509 | 조아라님] 할아버지의 소원
“(똑똑똑...) 안녕하셔유. 오늘 입원한 김O순 남편입니더. 지가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어렵게 찾아왔어라.” 어느 따스한 오후, 나는 흰 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채로 손녀뻘쯤 되는 나에게 아주 깍듯이 인사하던 70살 할아버지를 만났단다. 그 당시, 나는 A병원 의료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었어. 내가 주로 하는 일은 말야, 몸이 너무 아파서 수술이 꼭 필요하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였지. 아마 그 할아버지도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셨겠구나 - 하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아 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할아버지~ 제가 이야기를 들어드릴께요.” 라고 말하며 상담실로 안내해드렸단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소리내서 엉엉 - 울기 시작했어. “선생님, 우리 마누라 어쩐대유.. 글쎄 간이 망가져서 간 이식을 안하면 바로 죽어삘지도 모른데유..
지는 우리 마누라 없으면 못살아유. 나 좀 살려주세요...” 라고 말하며, 할아버지는 처음 보는 내 손을 꼭 잡고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어. 사실, 나는 사회복지실천현장에 막 입문한 ‘초보 사회복지사’였기 때문에 내 앞에서 울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는게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내드리며 “할아버지, 너무 힘들고 슬프시겠지만 천천히 저에게 말씀을 해보시겠어요?” 라고 말했어.
그러자 할아버지는 눈물을 간신히 삼키면서, 울먹울먹 이야기를 시작하셨지. 사실, 그 할아버지에게는 금쪽같이 사랑하는 어여쁜 할머니가 있었단다. 검은머리가 하얗게 변하도록 한 평생을 사랑한 아내이자, 남은여생을 함께 보낼 유일한 동반자였지.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의 얼굴이 개나리처럼 노-랗게 변하는 걸 보고 혹여 어디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병원으로 상경하신 길이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의 몸 속에 있는 장기 중에 ‘간’이 고장나는 바람에, 아픈 주사나 쓴 약을 먹어도 고칠 수 없을 만큼 병세가 깊어졌던거야.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여유. 선생님.... 나는... 나는 어쩐대유, 마누라가 간 이식을 못받으면 금방 죽는다고 하던데.. 내꺼라도 주고 싶은데 안되나유? 수술비도 비싸다고 하던디.. 수술비는 지가 집을 팔아서라도 할테니께 제발 우리 마누라 살 수 있는 방법좀 알려주셔요 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할아버지는 붉게 뜨거워진 눈으로 나에게 말하셨어.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어. “할아버지, 저는 할머니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아니지만, 병원에 있는 사회복지사에요. 할머니가 치료를 잘 받으실 수 있도록 치료비를 도와드릴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볼께요.”
내 말을 가만히 듣던 할아버지는, 이윽고 꼬깃한 주머니에서 통장 한개와 집 계약서를 꺼내셨어. 그런데 말야, 사실 ‘간 이식 수술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5,000만 원에서 1억, 혹은 그 이상의 돈’이 필요할 수도 있는 아주 비싸고 어려운 치료야. 다시 말해서, 할아버지가 금쪽같이 사랑하는 할머니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할아버지가 내게 보였던 돈 보다 집 한 채 값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지.
나는 할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기 시작했어. 그리고 할머니를 꼭 살리겠다는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곳곳에서 할머니 치료비를 위한 후원금이 모아졌어. 그러는 동안에 할머니는 벌써 2달째 입원 중이었고,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나오는 밥값도 할머니의 치료비에 보태시려고 병원 앞 편의점에 서서 도시락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며 생활하셨지. 그러던 어느 날, 그새 반쪽이 된 얼굴로 할아버지가 다시 날 찾아오셨단다. “선생님.. 진짜 내가 너무 고마워유.. 지가 이 큰 병원에서 의지할 곳이 선생님밖에 없어서 자꾸 찾아오게 되유.. 귀찮게 해드려서 진짜루 죄송하구만유.. 근디 선생님을 보면 누군가 응원해주는 기분이 들어서.. 지가유.. 너무 힘이 되유.” 할아버지의 그 따뜻한 손의 온기를 몇 마디 글자로 옮길 수 없겠지만 난 그날 할아버지의 수호천사가 된 것 같아 든든하면서도, 한 편으로 밀려오는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워졌어.
얼마 뒤, 나는 예상보다 할머니의 수술비를 더 많이 도와드리지 못했다는 마음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할머니 병실을 방문했지. “(똑똑똑..) 할아버지~ 할머니도 계셨네요~? 내일이 수술이시죠? 너무 불안해하지 마시고, 수술 잘 될꺼니까 마음 편히 가지셔야 해요. 그리고 제일 최근에 신청했던 후원금은 잘 안됐네요.. 죄송해요”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아버지는 펄쩍 뛰며 말씀하셨어.
“아니 선생님 그게 지금 무슨말이래유. 선생님 지 때문에 너무 부담을 가지셨나봐유. 선생님이 왜 지한테 미안해하셔유. 저한테 가장 고마운 분이 선생님이에유.. 어차피 지가 감당해야하는 수술비구만유. 지는 마누라가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에 감사해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단다. 오히려 할아버지에게 내가 위로받는 순간이었어. 첫 만남에서 내가 할아버지 손에 쥐어드린 따뜻한 커피처럼, 할아버지의 따뜻한 위로의 온기가 나를 휘감는 것 같았어. 반면에 ‘초보 사회복지사’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지.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되, 동감하지 말자’라는 중요한 <사회복지사로서의 자세>를 깨닫게 해준 셈이지. 이틑 날, 할아버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단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며, 딸이 간을 기증해주었는데 딸도 무척이나 건강한 모습이여서 다행이라고 덧붙였어.
그로부터 몇 달 뒤, 할아버지는 손수레 가득 밤을 싣고 나를 찾아왔어. “선생님.. 뭐라도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지가 돈은 없구.. 늙은 노이네가 드릴 수 있는거라곤 이런 것 밖에 없네유.. 우리 마누라 내일 퇴원해요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유 정말로유..” 처음 할아버지와 만났던 순간처럼, 할아버지는 모자까지 벗으시며 깍듯한 자세로 내게 인사를 건내시고 떠나셨단다.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어. “별 것도 아닌 지가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유.. 이번 일을 통해도 지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노망나기 전까진 항상 베풀며 살꺼에유.” 누군가를 돕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야. 다만,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멋진 용기와 먼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부끄러움 없는 마음씨가 필요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