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는 특유의 공기가 느껴집니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의 설렘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타지의 낯섦으로 기억되는 코 끝 간질이는 그런 바람을 가진 곳, 바로 서울역입니다.
언제부턴가 서울역에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한 모습에 대해 새롭게 가르쳐 주신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상과는 다른 곳으로 떠난 여행 속에서 모르는 새 성장하여 돌아오듯 저 역시 천천히 자라게 해 준 소중한 공간입니다.
화려한 지상 철도역을 지나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오면 또 다른 모습의 서울역이 펼쳐집니다.
지하 8번 출구 앞 긴 통로에서 매주 토요일에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대학생들이 직접 만들고 운영하는 무료 진료소입니다. 어느새 이렇게 매주 무료 진료소를 만들어 나간지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왔습니다.
종훈 삼촌을 처음 만났던 것도 토요일 오후, 무료 진료소에서였습니다.
평범하던 종훈 삼촌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성실히 다니던 직장을 잃고 아무렇게나 생활하기를 몇 달, 정신을 차려보니 종훈 삼촌은 모든 것을 잃고 텔레비전 속에서나 보던 노숙인의 모습으로 하루하루 지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일어서자.’하는 다짐으로 일자리를 찾아보았지만 몇 달간 높아진 혈압과 다시 생긴 당뇨 때문에 번번이 공사장 일도 현장까지 가서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아버님 혹시 진료 받으러 오셨어요? 번호표랑 시원한 차 한 잔 드릴까요?”
몇 달 동안 길거리에서 지내던 자신에게 모두들 코를 막거나 인상을 찌푸리며 스쳐지나가기만 했을 뿐 아무도 먼저 웃으며 다가와 준 적이 없었는데 처음 진료소를 왔던 때를 회상하면 이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종훈 삼촌은 매주 진료소에 오셔서 진료를 받으시고 혈압약과 당뇨약을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술 줄이기로 약속하실 땐 알겠다며 환하게 웃으시고 몇 주가 지나자 이제 다시 공사장 일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수줍게 자랑도 하셨습니다.
매주 진료가 시작되고 30분 쯤 지나면 항상 반가운 목소리가 저를 부릅니다.
“어~ 유진아.” “삼촌 오늘도 오셨네요, 따뜻한 차 한 잔 드릴까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먼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유진아 너 혹시 다이도르핀이 뭔지 아니?”
“다이도르핀이요? 이름 들어보니까 호르몬의 일종 같은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오늘은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며 미리 적어두신 쪽지를 건네십니다.
‘다이도르핀.
다이도르핀은 감동받았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에 빠져들었거나, 마음을 울리는 글귀를 읽었을 때, 멋진 풍경에 압도되었을 때 분비된다.
다이도르핀의 효과는 엔도르핀의 4000배에 이를 정도로 강력하다.‘
글을 읽고 있는 저에게 이어서 계속 얘기해 주셨습니다.
“삼촌이 유진이와 진료소를 알게 되고 나서 다이도르핀을 느끼게 된 것 같아. 너희랑 함께 웃으면서 대화하면 몸과 마음이 젊어지는 느낌이고, 항상 이런 저런 얘기 들어 주어서 고맙다.”
그렇게 종훈 삼촌은 매주 주말 진료소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삼촌 지난번에 받아 가신 혈압약은 잘 챙겨 드셨어요?”
“당연하지, 내가 이 약 때문에 그래도 일도 하고 사는데. 유진아 그런데 넌 오늘도 나왔니?”
“네? 저야 매주 나오죠.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시험기간인데 공부는 안 하고 여기 나와도 되나 내가 미안하고 걱정이 돼서 그렇지.”
“에이 삼촌 그게 무슨 얘기에요. 여기 매주 나와서 삼촌 얼굴 보고 다른 환자분들도 만나고 하는 게 훨씬 큰 공부라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아 그런데 너 Angel of the mornig이 무슨 뜻인지 아니?”
“음.... 아침의... 천사 아닌가요?”
“응. 그렇지. 이게 내가 대학 다닐 때 유행하던 노랜데 여기 있는 학생들 보니까 생각이 나서. 언제 시간나면 한번 들어 보라고.”
사소한 것도 나누고 싶어 하시고 챙겨주시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미처 부족했던 모습들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항상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소통하려 노력했다 생각했던 저에게 오히려 더 많은 가르침과 따뜻함을 주시는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종훈 삼촌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밝습니다.
“삼촌, 혹시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 표정이 싱글벙글 하신 것 같은데요.”
“유진아 이제 삼촌도 다시 고시원에 방 구해서 살게 됐어. 항상 너무 고맙다.”
“아 그러셨구나. 너무 잘 됐네요! 축하드려요. 약 꾸준히 드신 보람이 있네요.”
“그러게. 이제 여기 와서 약 받는 것도 얼마 안 남았네.”
“어? 왜요? 혹시 다른 먼 곳으로 이사 가시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이제 삼촌은 직접 돈 내고 약 사 먹을 수 있게 됐으니까, 여기는 또 예전에 나 같은 사람들 공짜로 약 타 먹을 수 있게 해야지.”
혈압을 재 드리다 종훈 삼촌이 하셨던 말씀이 그날 진료소 내내 마음에 남습니다. 다음에는 진료는 안 받아도 꼭 얼굴 보러 다시 한 번 오겠다며 캔 커피를 쥐어주시며 한사코 고마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이후 몇 번을 더 오시다 종훈 삼촌의 발걸음은 점점 뜸해졌지만 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종훈 삼촌과 같은 분들을 만나며 꾸준히 진료소를 지켜왔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계절 각각 자신만의 색깔로 만개하는 꽃들의 아름다움에서 한발 더 나아간 사람의 아름다움은 저마다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가진 다채로움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더불어 살아갈 줄 알 때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움을 지켜나가기 위해 모든 사람이 보장 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권리는 바로 ‘건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의료 혜택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사람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람의 정을 주는 일이 바로 진정한 ‘건강’을 찾아주는 일이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 제가 만날 또 다른 ‘종훈 삼촌’의 건강한 변화를 언제나 응원하며 함께 걸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