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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끔 보고 싶습니다. 김 씨 아저씨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605 | 신영미님] 가끔 보고 싶습니다. 김 씨 아저씨
[김 씨 아저씨와 어마 무시한 사건들] 김 씨 아저씨가 종종 그립고 생각난다. 그래도 이렇게 대체로 좋게 기억되는 걸 봐선 같이 지내면서 ‘우리도 그이도 함께 애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0대의 김 씨는 이가 많이 빠져있다. 얼굴은 거무튀튀하고, 머리는 좀 흐트러져 있고 항상 푸석푸석하다. 팔에 문신이 있고, 배가 나왔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닌다. 그리고 센터에 와서 상담을 하였다. 김 씨 아저씨는 수급자로 혼자 살았다. 근육통이 있음을 가끔 호소했다.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장 불편했던 건, 술 문제였다. 어머니 기일이면 술 드셨다. 한번 드시면 3주 드셨다. ‘어머니가 불쌍하다.’ ‘내가 불효자다.’ 하고 말씀하시다가 결국은 항상 고성과 만류가 오갔다. 어린이날이면 술 드셨다. 한참을 술만 드시고, 인사불성이셨다. 하루는 술 드신 상태에서 전화하셨는데, 농약 사다 놨고, 먹고 죽겠다 하였다.
서둘러 정신건강증진센터 팀장과 집에 가서 어르기도 달래기도, 그리고 협박(?)하며 농약을 압수하여 왔다. 언제는 자살하겠다고 실제로 센터에서 농약을 먹어 119 불러 병원에 가서 위세척하고 입원하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김 씨 아저씨는 집 오토바이에서 등유를 뽑아 센터에 왔고 몸과 사무실에 뿌려 라이터를 키려는 걸 남자 선생님과 공익이 날아차기로 라이터를 떨어뜨리고, 경찰 불러 상황 종료 되었다.
이 외에도 아저씨와 우리 사이에는 어마 무시한 소란들이 많이 있었다. [전과 같지 않게 여겨지는 아저씨.] 그럼에도 아저씨는 매일같이 센터에 오셨다. 그리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센터 커피로 인심을 쓰셨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면, 바쁜가 보다며 핀잔주며 센터 어디론가 갔다. 술을 먹고 와서 난리를 피웠을 때는 한 달 가량 잠잠하다가 다시 살살 센터에 오셔서 우리와 어울리고 싶어 하셨다.
바자회 있는 날에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주변정리를 열심히 하셨고, 바자회 마칠 때까지 스텝처럼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더니, 마치고 나서 마무리할 때 직원들과 늦게까지 애써 정리해 주셨다. 우리가 모두 지쳐 꿈쩍을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어두운 마당에서 마지막 쓰레기는 아저씨가 주우셨던 모습을 기억한다.
우리는 김 씨 아저씨의 이러함을 본격적으로 어떻게 해 보기로 했다. 종이파쇄와 박스 정리하는 것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감사를 표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항상 도움이 되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매일 센터에 오시면, 오늘 기분 좋아 보이신다며 인사를 하였고, 본인은 아침에 약 드셨음을 말씀 주셨고, 우리의 이런 건강한 만남이 소중하고 오래 되기 원함을 말씀드렸다. 우리는 회의시간에도 비공식적으로도 아저씨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 하였다. 아저씨의 애쓰고 노력하시는 것에 대하여 얘기하였고, 우리는 그 소재로 아저씨와 얘기하고 칭찬해 드렸다.
아저씨는 신바람 나게 센터에 드나드셨고,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STAFF이라 이름 하였다. 계획되지 않은 일에도 필요하다면 김씨 아저씨에게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렸다. 급하게 지역아동센터 2곳을 주선하여 가까운 곳에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일요일이었고, 준비를 위하여 일찍 센터에 갔는데, 아저씨가 센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어쩐 일이냐 여쭙긴 하였는데, 그냥 웃으셨다. 아마도 우리가 없는 토요일, 일요일에도 이렇게 센터를 기웃거리며 센터를 지켜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 일정을 말씀드렸고 마침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는데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 여쭈었더니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신발은 뒤축을 구겨 신고 있고, 옷매무새가 적당하지 않아 집에 가서 나들이 갈 준비를 하고 오시기를 말씀드렸더니 말끔히 씻고, 스킨도 바르시고, 양말에 신발을 갖춰 신고 오셨고, 함께 나들이를 갔다. 사실 사진이 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사진이 없긴 하였으나 연신 아이들의 예쁜 얼굴을 담기 위하여 셔터 누르고, 사진기를 소중히 다루려 노력했던 모습이 좋게 기억된다.
[김씨 아저씨와 함께 하면서 또 한 번 배웁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문제’들로 하고자 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이제는 퍼즐 맞춰지듯, 종합적으로 아저씨를 알아가 지는 듯 했다. 근육통이 있고, 잠수부를 오래하면서 두통도 생겼는데, 그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듯 했고, 엄청난 가난, 그리고 무 학력에 거친 삶을 살아왔고, 형제들과 모든 관계가 다 상하였다.
노모는 함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추운 겨울 냉방에 모시고, 제대로 역할하지 못한 것이 사무치게 죄스러웠던 것 같고, 기일과 어버이 날이면 더욱 그러했고, 그래서 저래서 그 날은 술을 먹었다. 아저씨는 중국교포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여자는 도망갔고 아이는 키울 수 없어 둘째 형에게 보냈다했다. 그 아이는 내가 아빠인줄도 모를 거라며... 그런데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다했다. 이제 술 드시고 얘기 하셔도 그분의 말에 귀 기울여 졌다. 그리고 아저씨도 적당한 때 집에 가기 위하여 노력하셨다. 일이 커지지 않기 위하여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센터에서 사회복지사와 자원봉사자와 함께 어우러져 착한 일들을 신나고 재미있게 하면서 지역에서 이웃이 되었고, 그러면서 마을과 섞여 어우러졌다.
할 수 있으면 피하고픈 사람이 아니라 함께 지낼만한 사람이 되어갔다. [아저씨의 마지막은 이러하다.] 여전히 정신없는 금요일 오후, 아저씨는 허름한 비닐봉투에 다양한 종류의 과일을 가지고 와서 책상에 하나씩 올려 주시면서 경동시장에서 사오셨다며 먹으라 하셨다. 이 조합은 분명 제사 과일이나 굿에 사용한 과일일 것이다. 우린 그 마음을 잘 알기에 고마움으로 받았다. 그러고는 그 날 밤에 약간의 술을 드시고, 집에서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술친구(이분도 센터와 각별한 분)가 밤에 놀러갔다가 확인하셨다 한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경찰서와 장례식장을 오가며, 진행과정을 살폈다. 직원들과 함께 김씨 아저씨 장례식을 예를 갖추어 참석하였다. 무엇을 기준으로 잘 살고 못 살고를 얘기하자면... 잘 모르겠지만 그저 난 지금도 가끔 아저씨가 보고 싶고, 그립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람을 어떻게 여기고 사귀어야 하는지 아저씨 덕분에 잘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