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순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한 학기가 시작하는 9월의 첫 날이었다.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신청했던 ‘독거노인 마실봉사단’으로서의 하루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집 근처 복지관으로 나선 나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함께 어르신의 댁으로 향했다. 사실, 향하는 발걸음에는 불안과 걱정이 한 걸음 한 걸음 쌓여 갔다.
대학생이 되고 그동안 많은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온 나였지만, 아이들과 놀아주는 봉사활동만 했을 뿐 어르신의 댁에 방문하여 1:1로 2시간동안 이야기만 나누는 봉사활동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내가 너무 어리다고 싫어하시면 어쩌지?’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도착한 어르신의 집 앞, ‘띵동~’ 벨을 누르고 들어간 어르신의 집은 남향으로 햇살이 들어 환하고 따스했다.
어르신은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는지 머리도 예쁘게 넘기고 계셨다.
어색하게 인사를 드리고 나에 대한 소개를 하니 어르신은 내 손을 꼭 잡고 와주어서 고맙다며 다정하게 눈을 맞추셨다.
나의 걱정과 긴장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매주 어르신을 만나면서 나는 점차 어르신의 가족이 되어갔다.
하루는 ‘어르신~ 저 왔어요.’하고 인사를 하며 집에 들어서니 ‘왜 정 없이 어르신이라 그러냐~ 할머니라구 그러면 되지!’하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께서도 함께 팔짱을 끼고 밖에 나가면 만나는 어르신들께 ‘어~ 우리 손녀야, 손녀!’하며 나의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괜스레 내 자신이 뿌듯해지는 순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어르신과 종종 밖에 나가면 여기저기 주문해놓은 물건을 찾아오기도 하고, 장도 보러 가고, 병원도 다녀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어르신이 차려주시는 따뜻한 점심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이야기를 나눈다기보다는 한 주간 어르신이 말할 사람이 없어 쌓아놓으셨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 시간이었다.
아프신 곳에 대한 이야기, 딸아들 이야기, 며느리 이야기, 부잣집 막내딸로 살았던 이야기, 노인정 사람들 이야기 등등 주제는 다양했다. 시원하게 한 주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으시고, 항상 마지막 대사는 ‘어뗘, 이제 밥 먹을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르신의 댁에 도착하니 언제나 내가 올 시간에 맞춰 조금씩 열어놓으시던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조금은 당황하여 초인종을 누르니 방문 간호사께서 문을 열어주셨다. 언제나처럼 ‘할머니~ 저 왔어요.’하는 말에 ‘오야~’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가니 할머니께서는 양 볼이 쑥 들어간 채 침대에 링거를 맞고 맥없이 누워계셨다. 너무 놀라 간호사님께 여쭤보니 어르신께서 일주일동안 소화를 못하셔서 먹지도 못하고, 조금만 먹어도 다 게워내셨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그저께는 입원을 하시고 어제 겨우 퇴원을 하셨다고 했다. 간호사님께서 가시고 난 누워계신 어르신 곁에 가만히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어르신이 이렇게 갑자기 아프고 힘들어하시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해 괜히 울컥울컥 했다.
어르신께서 그래도 약을 먹어야하니 점심을 드시겠다고 하여 간단히 죽을 내어드렸다. 상을 치우고 돌아오니 어르신은 다시 주무시고 계셨다.
조용히 어르신의 댁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무얼 할 수 있나...’하는 생각에 마음과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다음 주에 가보니 어르신께서는 많이 좋아지셔서 식사도 어느 정도 잘 하셨다. 그러나 한번 크게 앓으시고 건강상태가 전체적으로 많이 안 좋아지신 것 같았다.
어르신은 그 와중에 가장 친한 친구 분이 수술 중에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어르신께서 가장 친한 친구라며 사진도 보여주시고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던 분이라 나 역시도 잘 알고 있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께서 돌아가셨고, 자신은 그저 아파서 누워만 있느라 친구 장례식에도 못 갔다며 한스러워 눈물을 훔치셨다.
이제는 같이 놀이터를 돌고, TV를 보고, 반찬을 나눠 먹을 친구도 없다며 쓸쓸해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짐을 느꼈다. 더 친한 말동무, 더 살가운 손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어르신은 크게 아프신 뒤로 체 하시는 일이 잦았다. 당뇨에 더불어 신장까지 안 좋아지면서 식사를 잘 못하시고 헛구역질을 하셨다.
그래도 어르신은 내가 오는 날이면 꼭 고기를 녹여놓으셨다.
본인은 쌀죽에 동치미 국물을 드시면서도 나에게는 오리고기, 수육, 갈비, 고등어자반, 곤드레 밥, 냉면, 메밀국수, 콩국수 그런 진수성찬이 없었다. 후식으로는 과일, 전, 아이스크림 등을 항상 내어주셨고 다 먹지 못하면 집에 가서 엄마랑 나누어 먹으라며 싸주곤 하셨다.
어르신은 내가 당신의 음식을 야무지게 잘 먹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신다면서 꼭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어르신은 만난지 일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교환학생을 위해 외국으로 나가야했다.
어르신께 이 말을 꺼내러 가는 날 손에 땀이 흐를 정도로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겨우겨우 말을 꺼낸 나에게 어르신은 등을 툭툭 두드려 주시며 아쉽지만 학생 앞길을 자신 때문에 막을 수 없는 것 아니겠냐고 하셨다.
많이 상심해 하실까봐 걱정했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받아주셔서 그저 감사했다.
어르신과의 마지막 점심 식사는 역시나 고기반찬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이 평범한 음식들도 다 그리울 거라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 소중한 밥과 반찬을 하나도 남길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가는 현관에서 어르신께서는 돌아오면 또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릴테니 돌아와서 그 때도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꼭 전화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어르신 음식이 너무 그리워서 또 먹으러올테니 꼭 건강하게 계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문 밖을 나서면서 그 날도 역시 어르신께서는 꼭 안아주시며 건강히 다녀오라 웃어주셨다.
일 년 동안 어르신을 함께하며 느낀 것은 독거노인 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밥 한 끼를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상이 독거노인 분들에게는 일주일 동안 가장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시간인 것이다.
이젠 나에게도 일주일 중 그 점심시간이 정말이지 설레고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 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니까...
‘할머니~ 손녀 몸 건강히 돌아왔어요! 할머니도 건강하셨죠? 다시 할머니가 해주시는 그 맛있는 점심 먹으러갈테니 우리 오래오래 건강히 그 따뜻한 점심 함께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