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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달에 한 번 치킨데이
  • [자원봉사자활동수기 | 201608 ㅣ 오청휴님] 한 달에 한 번 치킨데이
멘토, 멘티라는 말이 어느 샌가 너무 흔히 쓰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부터 멘토링이라는 바람이 불더니 학원광고에서조차 ‘맞춤식 멘토링 학습’ 등의 슬로건을 내걸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과외중개 사이트에 자기소개를 할 때 ‘딱딱하고 지루하지 않은, 멘토같은 선생님’ ‘학생을 이끌어주는 멘토’ 등의 표현을 기재하곤 했으니까요. 점수만 올려주는 과외만 하다가 그와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학습 봉사에 무작정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자원봉사의 대상은 소외받은 계층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저는 멘토의 역할이 어떤 건지, 그 정의는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15살 여자아이들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첫 만남은 자신 있었습니다. 저는 남을, 특히 아이들을 재미있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어서 잔뜩 망가질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엑소도 좋아하지 않고, 떡볶이를 싫어하며, 남학생은 다른 세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게 제 예상과는 달라서 떨떠름하게 웃으며 속으로 진땀을 빼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수업은 시작되었습니다.
“쌤! 아직 설명해주지마세요. 제가 혼자 해 볼게요”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정말 학구열이 강했고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도 끝까지 풀어보려 노력했습니다. 절친한 사이였던 두 아이 사이에 은근히 선의의 경쟁구도가 만들어져서 지켜보는 내내 흐뭇했습니다. 하지만 지은이와 아름이는 수업준비물인 문제집 2권조차 부담이 되는 가정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교재를 깜빡하고 안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2주가 지난 후 그러더군요. “아름아 네가 말해” “난 못 하겠어” “네가 말하기로 했잖아”
“저..선생님..사실은 문제집을 아직 못 샀어요. 사달라고 엄마한테 얘기를 못하겠어서..” 문제집을 살 돈이 없다는 아이들의 상황을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내가 미처 그 부분까지 헤아리지 못했구나..’ 저는 사비로 교재를 마련한 후, 매번 예쁜 리본을 단 복사물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가져다주곤 했습니다.
“선생님 진짜 바보다 그치. 쌤이 교재 만들어야 되는 건데 원래!” “아, 진짜요..?” 저에게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니 아이들이 진짜냐며 배시시 웃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항상 밝은 표정으로 저를 맞아주던 아이들에게 상을 주는 마음으로, 학교 근처 치킨집에 데려가 먹고 싶은 메뉴를 다 사주었습니다. 볼이 미어져라 치킨을 먹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새삼 이해가 되더군요. “쌤, 다음 달에도 우리 열심히 하면 치킨 먹을 수 있어요?” “당연하지! 다음에는 저거 간장치킨 먹어보자” “헤헤, 콜이에요!”
“지은아, 너 손톱이 다 벗겨졌잖아?” 수업을 시작한지 한 달 후부터 느꼈던 문제점은 이 아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성적이나 가정환경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지은이는 손과 손톱을 심하게 물어뜯는 버릇이 있어 손톱주변과 손가락 끝이 벌겋게 벗겨져있었고, 아름이는 또래친구들에 비해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익숙해진 탓인지 고치거나 바꿔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멘토로서 아이들이 바른 길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충고와 조언을 통해 지혜를 전하는 사람이자, 진심을 담아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서툰 솜씨로 식단표를 만들어 아름이와 같이 쓰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습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문자와 카톡으로 식단을 확인하였습니다. 때론 잔소리도 하고, 서로 먹은 음식을 자랑하기도 하면서 영양사선생님처럼 아름이가 먹는 음식을 지켜보았지요.
뿐만 아니라, 아름이가 수업에 지각하거나 과제를 안 해왔을 때의 벌은 운동장 달리기로 정하여 수업이 끝나면 지은이를 먼저 보내고 아름이와 같이 달렸습니다. 자기가 벌을 받을 때마다 같이 힘들어하며 달리는 저를 보며 아름이는 항상 미안해하곤 했습니다. “헉..헉..미안하면 다음부터는 숙제 200% 다 해오기야!!” 매수업마다 치마가 느슨 해진만큼을 자랑하는 아름이는 정말이지 순수한 소녀 그 자체였어요.
살이 빠지니까 여드름도 줄어들었다고 항상 차갑게 대하던 오빠마저 자신이 예뻐진 걸 인정했다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 지요. 손톱 밑이 발갛게 벗겨진 지은이의 손을 매수업마다 사진으로 찍기 시작한 건 기필코 지은이의 손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요. 지은이가 제 앞에서 손을 물어뜯을 때마다 오른손에는 연필을 쥐어주고 왼손은 제가 따듯하게 잡곤 했습니다. 저는 매번 조금 더 새살이 돋아난 지은이의 손을 기대하며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깨끗하게 씻고 온 지은이의 손에 꽃향기가 나는 핸드크림을 발라주고, 학교선생님들에게 혼나지 않게 투명 매니큐어를 발라 손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쌤, 수업시간에 이런 거 해도 돼요?” 지은이의 손을 위해 봉숭아꽃잎과 비닐랩을 책상 위에 펼쳐 보이니 아이들이 계속 걱정했습니다. 선생님이나 숙직실 아저씨께 걸리면 혼날 것 같다고 조마조마해하던 아이들에게, 주저함 없이 봉숭아 잎을 찧어 손톱위에 올려주고 꽁꽁 랩을 감아주었습니다. “예쁘게 물들려면 하루 종일 붙이고 있어야 하는 거 알지? 내일 학교가기 전에 떼야 된다~”
지은이의 손은 그 이후로 급속도로 좋아지는 모습을 보였고, 두 달이 지난 후 새살이 돋은 예쁜 지은이의 손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찍은 자신의 손 사진을 쭉 보여주니 정말 신기하다고 선생님 요술쟁이라며 박수를 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많이 해준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멘토링 봉사를 돌이켜볼 때면, 그 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 걸, 조금 더 칭찬해줄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웃고 떠들고, 머리를 쥐어 싸매며 문제를 풀던 기억은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식단을 보내라는 선생님의 집착이 짜증난다며 투정부린 것도, 습관이 되어버린 손톱 물어뜯는 버릇에 잔소리를 들은 것도 아이들에게는 더 큰 경험과 추억이 되겠지요. 저는 이 멘토링 봉사가 주는 뿌듯함과 재미에 빠져서 올 해에도 누군가의 멘토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때쯤엔 조금 더 괜찮은 봉사자가 될 수 있겠지요. 누군가 나의 도움으로 조금 더 나아진다면, 조금 더 행복해진다면 그것보다 값진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남을 도움으로 인해 내 스스로가 더 행복해지는 경험을 제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멘토링 끝났어도 한 달에 한 번씩 치킨사주는 거 잊지 마세요!” “쌤은 치킨보다 즉석떡볶이가 더 좋은데~”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제가 버스를 타고 떠날 때 팔이 떨어져라 손을 흔들던 아이들 기억에, 코가 시큰거려지는 저녁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한 달에 한번은, 치킨데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