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센터

  • 내가 먼저 희망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609 | 김미연님] 내가 먼저 희망
2007년 10월 따뜻한 오후 처음으로 사회복지사로 면접을 보러 간 가을 어느 날,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소리 지르면서 떠드는 소리, 마당 한 귀퉁이에서는 조용하게 스케치북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면접은 오후 3시에 보게 되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그런지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한참 공사가 되고 있는 도로 끝자락에 가만히 그 주변을 보고 있자니 낯설기도 하고 가슴이 쿵쾅거리고, 기대도 되면서 ‘꼭 다니고 싶다’라는 작은 희망으로 기도도 해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면접시간 나에게 첫 질문은 ‘왜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였다. 나의 대답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사람을 도우는 것이 기쁨이고 감사라면서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저는 남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자라서 그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이 일에 보람을 느끼고 싶어서 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면접은 여러 질문이 있었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시설 내부 라운딩을 돌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합격자는 전화를 준다는 말에 하루 종일 핸드폰만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오전 10시 30분쯤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쁘고 감사하고 너무 행복했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항상 이 감사와 행복함으로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이 감정이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라고... 아이들은 연령은 다양하게 10명의 아이들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숙소로 배정되었다.
경력이 많으신 선생님과 짝이 되어서 교대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조금 냉정하게도 이야기 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무시하는 모습도 많이 있었다. 사춘기 여자아이들은 더욱 더 심했다. 어린 아이들은 금방 재미있게 해 주었더니 마음을 열고 친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고등학생 아이는 나에게 말도 하기 싫은지 동생 초등학생에서 말을 전달해 달라고 나에게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난 무조건 노력했다.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믿는 선생님이 되어보자고 다짐하고 노력했다. 주말에는 목욕탕도 가서 등도 밀어주고, 스킨십을 통해서 자연스러워지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년이 지난 어느 날 중학교 3학년이었던 사춘기 여자아이가 밤에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서 걱정된 마음에 대문까지 마중을 나가서 서성거렸다.
저 멀리 어렴풋이 여자아이의 형상이 보였다. 급한 마음에 뛰어 가서 확인해보니 우리 아이였다. 다행이기도 하고 화도 나고 너무 속상해서 연락도 없이 왜 이제 오는지 다그쳤다. 그때 여자아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집에 오기 싫어요, 나가서 살면 안돼요? 핸드폰도 없고 답답해요”라는 말이었다.
난 거기서 한마디도 해 줄 수 없었다. 아마 내가 위로를 했다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들 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어색한 상태로 우리 둘은 숙소로 들어왔고 조용히 아이는 씻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 일주일이 지난 무렴, 갑자기 아이가 아파서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난 얼른 차를 운전해서 학교에 가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대상포진이라는 피부병에 걸려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힘들어 하는 모습이 가슴이 아팠다. 상태가 심해서 삼일 정도 입원치료를 하자고 하여 입원을 하고 조용히 병실에 앉아 있는데 내가 물었다 “왜 집이 싫은지 물어봐도 돼??”
아이는 그냥 고개만 숙이고 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조용하게 “다른 아이들은 마음대로 핸드폰도 쓰고, 알바도 하려고 하고, 우리 집은 다 안 된데요.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못쓰게 하고 너무 싫어요.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난 그때 조금 충격이었다. 죽을 것 같다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자존심도 세고 말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은 파악했지만 마음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지냈다. 정말 미안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우리는 삼일을 보냈다. 퇴원하기 전날 우리는 야식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 고집불통 아이가, 그 자존심이 강한 아이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난 궁금해서 물었다.
아이는 쉽게 말을 하지 못하더니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나 꼭 결혼하고 싶어요, 그때 선생님이 엄마자리에 앉아줘요. 나 엄마아빠 다 없어서 그 자리 비어있는 게 가장 걱정되고 지금부터 생각해도 눈물나요. 그러니깐 쌤이 그 자리에 앉아줘요” 난 뭔가 가슴과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멍함이 있었다.
아이가 실망할까봐 놀랜 그 표정을 감추고 “당연하지 내가 먼저 시집가서 늙어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너 결혼하면 나랑 내 미래의 신랑이 엄마아빠 해줄게, 그리고 신랑은 꼭 보여주고 시집가야 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서로 웃고 잠이 들었다. 난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감정은 뭘까? 그 엄청난 충격 같은 느낌은 뭘까? 내 나이 25살 그 아이는 고작 16살인데 왜 벌써 결혼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을까? 난 그때 보육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 빨리 커서 여기에서 나가서 안정된 생활, 안정된 가정, 삶을 꿈꾸고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내 미래를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 아이들은 매일같이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생각하고 희망하는 것 같았다. 내가 부끄러웠다. 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때 엄청 울면서 내 미래를 계획해 보기로 했다. 천천히 하나씩 구체적으로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했다. 내가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면서 그때를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가장 크나큰 사건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보람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본 사건이었다. 어디에 가든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그때를 기억하며 다시 나를 점검하고 다독이고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고 있다.
9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는 대학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지내고, 난 결혼을 해서 열심히 늙어가는 중이다. 나중에 그 아이가 결혼할 때 엄마 자리에 앉으려면 내 삶을 부끄럽지 않게 멋지게 살아서 아이에게 멋진 엄마자리에 앉아 주는 것이 그 아이에게 그 힘든 유년시절을 보상해 주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다.
요즘도 그 아이는 안부를 묻기 위해 연락을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내가 그 약속을 잊어버렸을까봐 확인하는 멘트도 잊지 않는다. 그런 모습에 진심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다독이는 직업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보람을 느낌으로 버티고 감사하게 이 일을 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먼저 희망 있는 삶을 살아가면 내가 속한 직장 사회복지시설에서는 희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