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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노래
  • [자원봉사자활동수기 | 201609 ㅣ 조재윤님] 영원한 노래
저에게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노래가 있어요. 어떤 노래냐고요? 유성기로 듣던 아주 오래된 옛날 노래죠. 혹시 유성기를 아시나요? 축음기를 그 이전에 부르던 말이라고 해요. 음반을 꽂아서 회전시키면 ‘지지직’ 소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는 그 기계요. 일제 강점기에 사람들은 유성기를 통해서 노래를 들었다고 해요. 그 시절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많은 노래 중에 저에게 애틋한 노래 한 곡이 있답니다. 사실 다른 노래들은 몰라요. 오로지 그 노래, 그 곡을 듣고 있으면 생각나는 한 사람. 저는 지금부터 저에게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한 그 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작년 가을이었어요. 저는 사회복지 공부를 하며 봉사활동 겸 실습을 위해 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해 계신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요양시설을 첫 방문하게 된 저는 대부분 몸이 불편하시고 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들에게 진정한 말벗이 되어야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어떻게 어르신들에게 다가가야 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다행히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그런 봉사자의 마음을 아시고 어르신 식사하는 시간에 맞춰 말벗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요양시설에는 혼자서 일상생활이 힘든 와상 어르신이 많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봉사자들이 어르신 한 분 씩 맡아서 식사를 잘 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면서 자연스럽게 말벗이 되어 드릴 수 있었던 것이죠,
“선생님, 저 쪽 방에 김00 어르신 식사에요~ 이 어르신은 소화기능 때문에 이런 죽을 드셔야 해요.” 요양보호사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어르신께 죽을 조심스레 들고 다가갔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어르신 식사 가져왔습니다.”
그때 처음 만난 어르신은 저의 첫 한 마디에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하실 뿐이었습니다. 같은 방에 계신 어르신들에 비해 체격이 상당히 작으신 어르신이었습니다. 팔과 다리가 앙상하게 마르셨고, 볼에도 살이 없으셔서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이 마르신 상태였죠. 하지만 혼자 식사는 하실 수 있는 것 같았어요. 제가 가져다 드린 죽을 숟가락으로 스스로 퍼서 드시려고 하셨습니다. “어르신, 저는 오늘부터 봉사하게 된 000이에요~ 어르신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어르신이 편안히 식사하실 수 있도록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어르신은 계속되는 제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하시면서 대답하셨어요. 그렇게 그 어르신과의 첫 만남에서 저는 어르신 목소리를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을 하실 수 없으신 어르신일까, 그래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셨던 걸 보면 청력은 좋으셨는데, 많이 마르시고 힘이 없으신 걸 보니 말하기 힘드셨던 건 아닐까.’ 혼자서 이런 저런 많은 생각을 했어요. 며칠 뒤 다시 요양시설을 찾았을 때, 저는 새로운 봉사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어르신과 말벗이 되기 위한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저는 그 때 그 말씀이 없던 어르신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아, 그 어르신이요~ 그 어르신 노래 정말 좋아하셔요. 그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아! 목단강 편지! 이화자가 부른 목단강 편지라는 노래가 있어요. 어르신께 그 노래 들려주시면 굉장히 좋아하실거에요.“ 저는 저보다 훨씬 전부터 봉사를 시작한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 어르신께 다가갈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통해 노래를 다운 받아서 어르신께 다가갔어요.
“어르신,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오늘 어르신이 노래 좋아하신다고 해서 제가 노래 가져왔어요. 들려드릴게요. 식사하시면서 감상하세요.” 어르신께 식사를 챙겨드리고 노래를 켰습니다. 그때였어요. 어르신은 식사를 하시면서 고개를 조금씩 흔들고 음악에 리듬을 타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그 풍경이 참 신기했습니다.
어르신이 죽을 다 드실 동안 저는 계속 노래를 들려드렸고, 어르신은 식사를 하시면서 중간 중간 “얼쑤!” 하시며 박자에 맞춰 흥겨움을 표현하시기도 했어요. 노래에 푹 빠져계신 어르신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저는 대화 보다는 어르신이 식사를 편하게 하실 수 있도록 숟가락으로 죽을 떠드리면서 조금씩 도와드렸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다 하시고 나서 저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어요. “어르신, 이 노래 정말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응, 이 노래, 일제 시대 때 유성기에서도 많이 나왔던 노래야.” “아, 그래요~? 와, 정말 오래된 노래네요.” 저는 어르신과 대화를 하면서도 그 노래를 계속 들으실 수 있도록 반복재생 시켜놓았습니다. “응, 그럼. 정말 오래됐지.” 이야기를 하시고는 어르신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시는 표정을 짓고, 다시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셨어요.
“여기 ‘난초 피는 만주 땅’ 이 가사 말이지. 어렸을 때 내가 아버지 손잡고 이 만주벌판을 걸어 다녔지.” “와, 그래요 어르신~? 대단하세요. 그때가 몇 살이었어요?” “음, 한 열 살 쯤 됐나? 그럴 거야.” “정말 어르신 어렸을 때네요. 와 이 노래, 어르신 추억이 담긴 노래네요.” “그럼, 이 노래 많이 들었지.”
“어르신 다른 노래도 좋아하세요? 또 좋아하는 노래 있으세요?” “헤헤, 노래는 다 좋지.” “어르신 노래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제가 다음에 또 어르신 좋아하는 노래 들려드리러 올게요.” 저는 그 날 어르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첫 날 힘없이 계셨던 어르신이 이렇게 노래 하나로 생기 있으시고, 대화를 하시다니 놀라웠어요. 저는 그 이후로 계속 어르신을 찾아 뵐 때마다 그 노래를 많이 들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후에 어르신이 유독 노래 가사에도 집중하면서 노래를 감상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은 어르신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난초 피는 만주 땅, 여기 가사 있잖니. 거기 만주에는 이전에 이만한 난초가 많이 피어있었어. 여기 한강에서도 아마 볼 수 있을지도 몰라. 키는 이만큼 정도 되는 난초들이 많았지.”
“우와 그래요 어르신~? 한강에서도 볼 수 있어요? 와 저는 만주벌판 가보지도 못했는데, 만주벌판 진짜 크고 넓겠죠?” 저는 그 이후로 어르신의 말벗이 되어드릴 때 항상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목단강 편지 외에도 많은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아리랑, 그리고 유성기로 듣던 시절 노래 모음들을 준비해서 들려드리기도 했어요. 어르신은 모든 노래를 잘 들으셨지만, 그중에서도 목단강 편지만큼 푹 빠져 감상하게 되는 노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유독 그 노래를 좋아하셨던 어르신은 제가 사정상 전혀 혼자서 식사를 하실 수 없는 다른 어르신의 식사를 지원해야 했을 때에도 옆에 그 노래를 틀어드리며 기분 좋은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해드렸어요. 그러면 항상 어르신은 리듬에 맞춰 고개를 흔드시고, 박자에 맞춰 “얼쑤!”하시면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점점 추워지는 겨울을 앞에 두고 있었어요. 그동안 저는 어르신의 말벗이 되어드리는 봉사 외에도 실습을 위해 여러 가지 주어진 과제들을 하며 정신없는 날을 보냈습니다. 요양시설에서의 마지막 방문 날, 저는 어르신과 좀 더 많은 대화 시간을 보내고 싶어 어르신 옆에 오래 있었어요. 그 날도 어김없이 그 노래를 틀고 말이죠. 한참 노래 이야기와 어르신의 또 다른 과거 이야기, 시집살이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렇게 많은 대화가 오고가고 저는 어느덧 어르신께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 했어요.
“어르신... 저 이제 실습이 끝나고, 다시 공부하러 가요. 그동안 어르신한테 노래 들려드리고, 어르신이 제게 이런저런 이야기 해주셔서 너무 좋았는데 아쉬워요.” “에고, 아니여~ 공부해야지, 그럼. 공부 열심히 해야해.” “네, 어르신! 저 꼭 시간 될 때마다 어르신 찾아뵈러 다시 올게요. 그때 또 이 노래 들려드릴게요.”
그 날 인사는 그렇게 어르신과의 마지막이 되어버렸습니다. 직장생활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던 저는 다시 요양시설을 찾아 뵐 여유가 많지 않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르신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르신은 작년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고, 요양시설 간호사 선생님께서도 어르신이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예상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가족들도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어르신께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이제 다시는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그 노래를 들려드릴 수 없게 된 것이 참 가슴이 아렸습니다.
“난초 피는 만주 땅에 흙이 되소서~” 홀로 듣는 목단강 편지 노래 중에 이 가사가 참 슬프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저는 마냥 슬프지만은 않아요.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노래를 평생 알지도 못했을 거예요. 유성기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거예요. 이 노래가 일제 강점기에 듣던 노래라는 것도 알지 못했겠죠.
이 노래를 들으면 저는 자연스레 영화 같은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만주벌판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시절 어르신의 모습을요. 아프리카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해요. ‘노인 한명이 사라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저는 이제 이 말의 뜻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진정한 말벗이 된다면 어느새 나도 몰랐던 세계와 삶을 알게 될 것을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이 알려주신 그 영원한 노래를 항상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