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이 성큼 내 앞에 다가왔던 2016년 어느 봄날..
봄맞이 자리정돈을 위해 갖은 서류들과 뽀얗게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였다.
내 서랍 가장 깊숙이 곱게 접혀있던 종이 한장이 분주했던 나의 손길을 멈추었다.
접혀있던 종이를 풀어보니 벌써 3년도 훌쩍 지난 과거의 시간들이 다시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가기 시작했다.
나는 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의 평생교육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였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오고가는 복지관에서 유독 눈이 가던 한 분이 계셨다.
150도 안되던 작은 키에 눈가의 주름이 참 예뻤던,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도 귀여워보였던, 한 분이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라는 나의 짧은 물음에, 어르신은 잠시 멈칫 하시더니 이내 말을 이어가셨다.
“공부가 하고 싶어왔어요, 글을 배울 수 있을까요?”라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떨구는 어르신이었다.
신00어르신은 부산에서 오랜 시간 거주하시다가 부산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큰아들이 거주하는 동두천으로 이주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어르신이었다.
아들 내외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에 아는 사람도, 친구 한명도 없었던 어르신이 복지관을 방문한 것이다.
어르신은 읽고 쓰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던 문맹자였다.
그러던 중에 노인복지관을 직접 찾아 한글을 배우기 위해 아들의 권유로 복지관을 방문하셨던 것이다.
2011년 5월부터 복지관을 다니기 시작하셨고,
어린 시절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학교를 가지 못했고 자식들 낳고 키우다 보니 내 시간은 없었다며
“나는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요 선생님”하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던 어르신을 잊을 수가 없다.
수시 접수가 가능했던 한글교실 프로그램에 어르신을 연계 해 드렸고, 어르신은 수업을 빠지는 경우가 없이 늘 책가방을 둘러매고 복지관에 다니셨다.
어쩌다가 이따금씩 수업이 휴강할 때면 가장 아쉬워하시는 것도 신00어르신 이었다.
아마 그 어르신을 보면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직접 느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 날 우리지역에서 문해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화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매일 책만 보는 어르신들에게 뭔가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았던 시화전..
당시 담당 강사님 또한 어르신으로 시화전을 담당 강사님께 맡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한글교실에 참여하는 모든 어르신들이 이번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화전 특강 프로그램 시간을 마련하여 내가 직접 어르신들과 시화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제 단어를 쓰기시작하고 문장을 이해하기 시작한 어르신들에게 시화전은 무척이나 낯선 경험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한글을 배우면서 느낀 감정들 또는 가족이나 지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과 편지를 예로 들며 자유주제로 글을 써보기로 했었던 것 같다.
막막했던 글쓰기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어르신들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글을 직접 한자 한자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들이 결혼 후 첫 손주를 안겨 주었던 ‘세상 제일의 기쁨’,
한글을 배우면서 내 이름 석자를 쓰고, 지나다니면서 본 순대국집,
쏘가리 매운탕집의 간판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나도 이제는 보입니다’,
운동을 다니며 길가의 코스모스가 너무 예뻤다던 ‘가을’,
군대를 가는 손자에게 써주는 편지 ‘손자에게’,
시장 구경을 하며 여러 가지 물건을 샀다는 ‘동두천시 큰시장’,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세상 떠난 아들아’,
정치하는 분들에게 힘주고자 했던 ‘용기’,
이웃과 함께했던 이야기 ‘9월 6일의 일상’,
한글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는 ‘나는 배워서 행복합니다.’
그렇게 총 9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탄생하였다.
커다란 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자들을 써 내려간 어르신들은, 연필로 작성해 온 글을 천천히 써 내려가고 그 위를 다시 볼펜으로 꾹꾹 눌러 따라 써가며, 다시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예쁘게 종이를 채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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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워서 행복합니다’ (동두천시노인복지관 신00)
좋은일을 많이 하는 선생님을 만나서 참 좋습니다.
나라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복지관이 참 좋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니 그 백합이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하양 백합 비가 갠 아침 세상에 온통 하양백합처럼 활짝 피어났습니다.
백합 속에 파묻힌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하루하루 즐겁게 재미있게 살아갑니다.
나는 글을 쓸 줄 모릅니다. 그저 배우는 것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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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00어르신의 작품에 백합 한 송이를 그려드렸다.
그것이 내가 어르신께 해 드릴 수 있는 전부였다.
그저 배우는 것이 행복하다는 어르신의 마음이 담긴 글이 내가 본 어떤 작품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작품을 출품하고 난 후, 며칠 뒤 반가운 소식이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제출한 작품들 중 신00어르신의 작품을 포함한 총 2작품이 시상을 받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렇게 기쁜 수상 소식을 신00어르신에게 전달하고 시상식 당일 예쁜 꽃다발을 사들고 어르신을 모시고 전시회장을 찾아 작품을 직접 관람하고 축하하는 시간을 갖았다.
그렇게 시상식이 끝나고 며칠 뒤 하얀 편지봉투 안에 곱게 적힌 편지 한통이 내 책상위에 올려 져 있었다.
신00어르신의 편지였다. 삐뚤빼뚤하고 이곳저곳의 맞춤법이 틀린 글 이었지만 아마 이제껏 내가 받았던 어떤 편지보다도 감동스럽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편지였다. 시화전 수상이후 아마 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연필을 꾹 눌러 잡고 나를 위해 편지를 쓰셨을 어르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내가 사회복지 현장에서 9년의 시간을 일하면서 ‘아~ 내가 이 일을 하기를 잘했구나’라고 생각한 첫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편지 한통이었겠지만 결코 나에게는 잊혀 지지 않을 2012년 10월24일의 편지였다.
지금은 개인사정으로 어르신을 복지관에서는 볼 수 없지만,
오늘 문득 책상정리를 하면서 발견했던 편지 한통을 보며 어르신께 연락 한 번 드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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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편지내용/맞춤법 변경하지 않은 원본 그대로의 글입니다.]
2012년 10월24일
선생님 벌써 여름이 가고
가을예 단품잎이 꽃갗이 고기도 합니다.
참세울이 빠람길 갔습니다.
가을 햊쌀이 파란하늘과 청명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상을 받았습니다.
신경을 많이 써 습니다.
꽃그림을 예쁘계 거렸습니다.
참으로 고았습니다.
신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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