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지리산 등정? 거기에 애를 하나 업고? 야 설마...그게 말이 되냐?”
대학교 4학년, 난 ROTC 2년차였다.
그 날은 학군단에서 군사학 수업이 있던 날. 그런데 학군단에 도착해 보니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소문은 바로 학군단에서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장애인복지시설의 장애아동을 업고 함께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한다는 내용이었고, 나는 그 소식에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의 전공은 초등특수교육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난 나의 전공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자폐 판정을 받은 사촌동생으로 인해 특수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대학 전공으로 결정했었던 고3 시절.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깊은 고민 없이 흘러 흘러 결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어느 지역에 임용시험을 볼지 고민하던 시기에 난 임용고시를 봐야 할지, 내가 특수교사로서 어울리는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고민이 많던 시기에 결정된 지리산 천왕봉 등정 계획은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도대체 혼자 올라가기도 힘든 지리산을 왜 장애아동을 등에 업고 올라가야 되는 거야!’
난 이 계획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까라면 까는’ 군대 특성 상 아무 말 못하고 지리산으로 끌려갔다.
장애아동 한 명당 ROTC 후보생 한 명이 팀을 이루었다.
내가 담당하게 된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의 여자 아이.
지체장애로 하반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아이였다.
‘그래도 여자아이라 다행이네... 무겁진 않겠다.’
그렇게 등산이 시작되었다. 처음 두 시간은 별 부담이 없었다.
운동을 그다지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뿐했다.
OO이도 내 등 뒤에서 학교와 친구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아저씨! 저 산에 올라가는 거 처음이예요. 항상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 곳 까지만 갔거든요. 이렇게 꼭대기까지 가는 건 처음이라 너무 기대돼요.”
OO이는 이번 등산에 많은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주변에 만개한 라일락 꽃도 구경하고 물도 마셔가며 여유롭게 이동했다.
지레 겁먹고 등산가기 싫다고 투정부린 내가 민망해졌다. 이렇게 동행과 함께 등산을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점점 OO이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까 쉬면서 마신 물이 이렇게 무거운가 싶을 만큼 처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등이 아파왔다.
자세가 점점 구부정해졌다.
그렇게 계속 올라가다가 실수로 발을 헛딛고 넘어졌다. 옷이 찢어지고 무릎에서 피가 났다.
“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자조 섞인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러자 OO이가 넘어진 상태로 내 무릎 주변을 만지며 걱정해 주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많이 다쳤어요? 그냥 올라가지 말까요?”
솔직히 그만두고 싶었다.
정상에 올라간다 한들 도대체 뭐가 남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 순간 OO이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넘어질 때 긁혀서인지 피가 나고 있었다.
“OO아, 너 피 나잖아. 안 아파?”
“전 괜찮아요, 전 업혀 있을 뿐인데요. 아저씨가 다치셨잖아요.”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다 큰 어른이 조그마한 어린 아이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다.
난 항상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하려했던 것은 아닐까. 이 정도 등산도 끝까지 해내지 못하는데 내 꿈과 미래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그 때였던 것 같다. 이번 등산의 목적이 생긴 것이 말이다. 나 자신을 다 잡는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아저씨는 괜찮아. OO아 미안해. 다시 아저씨랑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자. 너 산꼭대기에 가 본적 한 번도 없다고 했잖아. 아저씨가 꼭 보여줄게.”
등산을 포기하는 것은 내 인생을 포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를 악 물고 OO이를 다시 업고 출발했다.
그 때부터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는 OO이가 산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OO이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해가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결국 천왕봉에 도착했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고 OO이는 그런 내게 수고했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어째 서로 뒤바뀐 듯 한 상황에 헛웃음이 났지만 대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후 OO이를 천왕봉 표지석에 데리고 갔다. 함께 지리산의 풍경도 바라보았다. 웅장한 자연 속에 나 자신이 너무 작아지는 것 같았다.
나의 고민과 걱정이 한낱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저씨!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정말 좋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지리산의 풍경을 보고 연신 감탄하던 OO이가 내게 말했다.
난 누군가의 인생에서 잊혀 지지 않을 추억 하나를 선물한 것일까. 잠깐이지만 그 순간 특수교사가 되어도 보람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다.
그렇게 천왕봉에서 내려왔고 우리들은 지리산에 있는 대피소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각 팀별로 가지고 온 재료를 이용해 저녁을 해먹게 되었다.
모두 갖가지 재료를 꺼내어 요리하기 시작했다.
김치 볶음밥부터 된장찌개까지 군침 도는 요리를 하는 동기 녀석들.
하지만 요리 실력이 형편없었고 무엇보다 이번 등산에 의욕이 없었던 내가 준비한 재료는 고작 라면 3개.
그나마 애걸복걸하여 동기로부터 대파 한 줄기를 빌려 라면에 넣었다. 미안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미안해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되려 위로해주는 OO이.
“저 라면 되게 좋아하는데! 저 업고 오시느라 힘드셨으니까 아저씨, 많이 드세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살피게 된 것일까.
보통의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OO이의 위로에 난 마음이 놓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쓰리고 아파왔다.
이 녀석에게 더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라면을 후루룩 먹고 있는데 심술궂은 동기 녀석들이 우리 곁으로 찾아와 하는 말.
“OO아! 이 아저씨 별로지? 아저씨 팀에 들어올래? 맛있는 거 같이 먹자”
“아니요! 난 광현이 아저씨가 더 좋아요. 라면도 맛있고요. 아저씨보다 더 잘 생겼어요!”
OO이 덕분에 우리는 모두 한 바탕 웃었고, OO이 핑계로 다른 팀의 음식도 뺏어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무사히 지리산 입구까지 내려와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복지시설에 도착해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한 우리들. OO이가 내게 와서 악수를 청했다.
“아저씨가 우리 선생님이였으면 좋겠다! 아저씨가 선생님이 되면 우리 꼭 다시 놀러가요!”
지리산에 올라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 OO이에게 말했던 나의 전공과 고민 이야기.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했던 것이다.
OO이의 그 말에 난 망설이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동안 망설였던 내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OO이의 웃음에 사촌동생의 미소가 겹쳐졌다. 처음 특수교육을 전공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생각이 났다. 너무 예뻤던 사촌동생. 이런 천사 같은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난 특수교육을 전공했었다.
지리산 등정은 내 인생과 미래를 바꾸어 놓은 등산이었다.
난 그 이후 임용을 보았고 현재는 특수교사가 되어 천사 같은 아이들과 매일매일 지지고 볶으며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 학교 주변에는 봄이면 라일락 꽃이 만개한다.
때문에 봄이면 라일락 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교실까지 들어온다.
OO이와 지리산에 올라가던 도중 산길을 따라 피었던 보랏빛 라일락 꽃.
아름다운 맹세가 꽃말인 라일락 꽃 처럼 좋은 특수교사가 되겠다고 OO이에게 했던 그 약속을 앞으로도 계속 지키고 싶다.
그 날 OO이를 업고 천왕봉으로 가던 모든 과정은 OO이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나의 미래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