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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마술
  • [자원봉사자활동수기 | 201612 ㅣ 김세훈님] 진정한 마술
“친구야! 오늘이 바로 그 날인거 알지? 옷 뜨숩게 입고 있어. 내가 델러 갈께!” 작년 겨울의 어느 일요일 새벽. 나의 단잠을 깨운 것은 고향친구였다. 연탄배달 자원봉사를 가겠노라 지난 주말 엉겁결에 약속을 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서른이 넘어 겨우 취직을 해 홀로 자취를 하는 처지. 주말이면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가스비 아끼느라 보일러 한번 제대로 돌리지 못해 집에서도 겹겹이 옷을 껴입고 사는 내가 불우이웃이거늘 누가 누굴 돕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집 앞까지 쫓아 온 친구를 억지로 따라 나서야 했고, 휴일의 꿀맛 같은 늦잠을 포기해야 했던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짜증스런 말투가 튀어 나왔다. 우리가 연탄을 배달해야 하는 곳은 봉천동 달동네. 내가 사는 자취방과 멀지도 않은 곳이거늘 어안이 벙벙해져 왔다.
차량은커녕 리어카도 제대로 올라갈 수 없어 사람이 하나하나 손으로 지게로 연탄을 날라야만 하는 가파른 길은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벌써 나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고작 8개의 연탄을 등에 지고 처음으로 오르는 길. 금세 숨이 턱에 차올라 투덜거릴 여유마저 사라졌고, 내려오는 길엔 다리가 풀려 나도 모르게 갈지자로 걷고 있었다.
살을 에는 날씨에는 아랑곳없이 뚝뚝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 가며 두 집 정도에 겨우겨우 연탄을 배달해 드렸을까? 연탄을 받으신 어느 할머니가 주셨던 따스한 커피믹스 한잔을 마시며 잠시 쉬려는 찰나. 백발에 너무도 깡마른 할아버지가 인상을 쓰시며 “왜 이리 늦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장정들이 겨우 이것 밖에 못드는겨? 어서 어서 해야지! 저 윗집이 우리 집인 거 알지? 빨리 빨리 연탄 좀 날라줘.” 우리를 채근하셨다.
할아버지의 집에 연탄을 배달해 드리러 온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못해주실망정 외려 화를 내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기가 막혀왔다. 하지만 차마 할아버지께는 화를 내지는 못하고 친구에게 성질을 부리며 연탄을 날랐다. 나보다 몇 년 전에 서울에 올라온 친구지만 녀석도 뻔 한 형편. 거기에 몸을 쓰는 일을 해 매일 파스를 달고 사는 녀석이 왜 남을 돕겠다고 나서 몸은 몸대로 고생하고 이런 욕까지 먹고 있는지 그만하면 오지랖이라고 내내 구박을 했다. 하지만 친구는 그저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이윽고 할아버지 댁에 들어갈 연탄 500여장을 젖 먹던 힘을 다 내어 나르고 보니 벌써 점심시간은 넘은 듯싶었다. “자! 그럼 이제 내 차례지. 청년들은 좀 쉬고 있어. 저기 보리차 끓여 놓은 거 있으니까 마시고 내려가고. 어서 어서 하고 늦기 전에 얼른 집에 가”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없어 할아버지를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연탄집게에 연탄을 살뜰하게 집어 할아버지 집 뒤의 비탈길로 올라가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외소하고 좁은 어깨는 어느새 마술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는 한동안 멍한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집 뒤 비탈길 사이로 올라가면 또 집이 있어. 거긴 돈 주고 연탄을 배달해 달라고 해도 안 해줄 정도로 길이 험하고 우리 같은 덩치 큰 사람은 올라가지도 못해. 그래서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빨리 빨리 하라고 재촉하신 거야. 뒷집 할머니가 오매불망 연탄을 기다리고 계실 거거든. 할아버지 댁에 나둔 연탄을 뒷집에 나눠 드리려면 아마 할아버지는 위에 할머니 집에 연탄배달 하시느라 며칠 내내 고생하셔야 할 거야. 말씀은 투박하시지만 참 좋으신 분이야.” 할아버지께 욕을 먹고도 친구가 조용히 미소 짓던 이유를,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연탄을 기다리셨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작고 굽은 몸으로 비탈길을 지나 좁디좁은 남의 집 연탄창고에 연탄을 쌓아 두시느라 다치신 적도 있으셨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자 흘렸던 땀방울보다 더 투명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가 연탄불 위에 일부러 올려 두신 따뜻한 보리차 한잔을 마시고, 다시 해가 질 때까지 누구보다 바지런히 연탄을 날랐다. 달동네 길은 밤이 되면 더욱 위험하기에 우리는 어둠이 내려앉기 전 일을 끝내고 내려와야 했다.
허나 자꾸만 자꾸만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정말 달과 가까운 그 집으로 눈길이 머물렀다. 내 삶이 힘겹기에, 내 형편이 고달프기에. 남을 돕는 것은 사치라고 여겼던 바보 같던 나였다. 그래서 서른이 넘도록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나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었던 나였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시커먼 연탄을 들고 얼굴이 새카맣게 변할 때까지 연탄배달을 하면서 나는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 할머니의 방이 따스해 질 것을 상상하며. 어떤 가족의 집이 훈훈해 지리란 기대는. 할아버지의 연탄창고에 연탄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은 나의 마음을 뜨겁고 새하얗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나 온 다음 날에도 인생의 궤적보다 더 험난한 길을 지나 누군가에게 연탄을 나누어 줄 할아버지를 떠 올리며 진정한 나눔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한 순간에 무엇이든 사라지게 하는 마술처럼. 한 순간에 무엇이든 두 배로 만들게 하는 마술처럼. 나눔은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행복을 두 배로 만들어 주는 진짜 마술임을. 나는 할아버지를 통해 가슴으로 진정한 마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