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봐. 사팔이 지나간다.”
“눈 왜 저래? 징그러워.”
어릴 적 동네에서 나는 꽤 유명한 녀석이었다.
또래 아이들과 교복을 입은 형 누나들은 물론 동네 어른들도 나를 ‘눈 아픈 애’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시, 고도약시, 의학적 실명.’
5살 무렵에 가지게 된 내 병명이다. 오른쪽 눈에 갑자기 찾아온 사시는 상태가 아주 심해 검은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른쪽 눈만 그렇다 보니 정상인 왼쪽에 비해 더욱 대비되어 보였고 결국 ‘사팔이’는 학교에서의 따돌림으로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사회화 시기인 그때의 경험이 청소년기의 대인기피, 불안장애로 이어져 고교 자퇴까지 이른 듯하다.
주치의의 권유로 성인이 된 후 수술을 받기로 했고 수회에 걸쳐 수술, 재발 그리고 다시 수술 끝에 결국 오른쪽 눈의 사시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시력은 살릴 수 없지만 외관상 정상에 가까운 모습을 비로소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세상을 반밖에 보지 못한다는 한계와 시력이 급속히 저하되고 있는 왼쪽 눈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만 보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에 따른 진로를 찾아보기로 했고, 그 결과 치과위생사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치과위생사란 치과의사의 시술을 보조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스케일링을 전적으로 담당하기도 하는 직업이다.
환자의 구강만을 들여다보며 내 스스로의 전문적인 시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껴 스물둘이라는 늦은 나이에 치위생과로 진학했다.
무사히 한 학기를 보내고 2학기가 되었을 때 학과에서 ??학교로 구강보건봉사 가는 것을 제안하자 솔직히 망설였었다.
부모님께서 내 이름을 요섭으로 지으실 만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 태어난 터라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을 자연스레 접했고 지금까지도 주말에 나가고 있다.
그런데 학업을 위해 온전히 집중하고 싶은 순간에 또 봉사라니.
다른 학교 치위생과 학생들은 그 시간에 여러 가지 실습을 하며 실력을 키우고 있을 텐데 하며 뒤처지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더욱이 ??학교는 마음이 조금 아픈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다.
마음 아픈 친구들을 위한 봉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나의 서투름에 아이들이 불편을 겪진 않을까 두려웠지만 교수님의 추천으로 나가기로 했다.
첫날 첫 환자로 만난 OO이는 체구가 아주 작은 아이였다. 충치가 있어 치료를 하게 되었고 의자에는 곧잘 앉았지만 치과기구가 기계음을 내며 작동하자 치료를 받지 않으려 작은 몸을 비틀고 있었다.
다치지 않게 OO이의 몸을 붙잡아 고정시키는 게 나의 역할이었는데 울고 있는 그 작은 몸을 내 큰 손으로 붙잡아야 했을 때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하지만 기구가 치아가 아닌 잇몸이나 혀에 닿으면 위험했기에 억지로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조금만 참자.”
시간이 지나 내 얼굴이 땀범벅이 되었을 때쯤 위험한 시술은 모두 끝이 났고, 후처치가 시작됐다.
OO이도 이젠 무섭지 않은 듯 치료를 잘 받아주었다. 그때쯤 내 긴장이 풀렸는지 두 팔이 저려왔다.
저려오는 팔보다 걱정되었던 건 억지로 자신을 잡아야 했던 나를, OO이가 미워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앞으로 계속 볼 사인데... 미워하면 안 되는데...’
치료가 모두 끝나서 OO이를 의자에서 내려주려 다가서자 OO이가 나를 잠깐 응시하더니 이내 나를 향해 아주 밝게 웃어주었다.
앞니 중 하나가 빠져 아주 깜찍한 웃음이었다. 나는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밝게 웃어주다니. 순간 다 큰 성인인 나보다 ☆☆이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사시로 인해 내가 받던 시선들과 그 불편함들. 왜 나는 한 번도 웃으며 이겨내지 못했을까.
어쩌면 내가 받아야 했던 그 시선들 중에는 차별이 아니라 관심과 온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모두 불편함으로만 치부해버리고 스스로 더 숨어버린 건 아닌지. 실제로 세상을 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의 눈도 반만 뜨고 있었던 건 아닌지 OO이를 보고 반성하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 첫날이었다.
한 학기 동안 안타깝게도 OO이는 나를 형이라든가 선생님이라든가 하는 호칭으로 불러준 적이 없다. 그저 나를 만나면 한번 씩 웃어주는 것. 그것이 최소이자 어쩌면 최고인 의사소통이었다.
조별과제 등으로 학과 친구들과 마찰이 생길 때 사람이 참 이기적인 것 같고 사람을 대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다 봉사를 간 날, OO이가 날 향해 씩 웃어주면 마음이 따뜻해져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천사 같던 OO이가 하루는 몹시 울며 몸을 비틀었다.
그 시간 나는 옆자리 다른 아이의 진료를 돕고 있었는데 우는 와중에도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분명 무서운 시술이 아닌데 왜 그럴까 생각하는 순간 OO이 자신의 몸에, 함께 봉사 온 여자 동기의 손이 닿는 걸 불편해 함을 알게 되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OO이가 부끄러운가 봐요. 남자선생님이 대신 잡아주세요.”
지도 선생님의 말씀에 달려가 OO이를 안아주었더니 그제야 천천히 울음을 멈추었다.
그랬구나. 너도 다 느끼고 알고 있었구나.
그저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만 여기고, 청소년기 남학생이 갖는 감정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 잘 자라고 있던 OO이를 우리가 장애라는 이유로 아이로만 생각하고 아이이길 바라고 아이로만 대한 건 아니었는지.
이날 이후 ☆☆이를 비롯해서 다른 이에게 봉사를 할 때 얼마나 더 세심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깨달았다.
봉사 마지막 날은 OO이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치과치료 중이었기에 초콜릿, 사탕 같은 선물 대신 뽀로로 칫솔을 준비했지만 그날 OO이가 개인사정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해 작별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칫솔은 지도선생님 편으로 전달했고 그렇게 학기가 끝나고 나는 군 휴학 후 바로 훈련소 입소를 했다. 그리고 2년간의 공익근무 끝에 올해 소집해제를 했다.
하지만 원래 앓고 있던 불안장애 증세가 다시 심해져, 지금은 휴식기를 갖고 있다.
이제 천천히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뭐부터 해야 할까. 무슨 일부터 할 수 있을까.
숙고 끝에 생각해낸 건 가치 있으면서도 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 바로 봉사였다. 증세가 회복이 되면 ☆☆이에게 다시 찾아가고 싶다.
이제는 ☆☆이가 치아가 많이 좋아졌겠지. 어쩌면 이번엔 초콜릿, 사탕을 선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 너를 통해 내 자신을 되돌아보고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된 게 나에게 선물이야.
네가 나한테 준 선물. 조만간 나도 또 다른 선물로 보답하러 갈게. 나를 기억해주고 그때처럼 웃어주면 좋겠다. 곧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