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아이들을 뉴질랜드로 보내고 나는 우리에 갇힌 기러기가 되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나에게 모이를 주고 나에게 리모컨을 주고 나에게 러닝머신을 주면서 하루에 꼭 한 번씩 해야 하는 일들을 하게 하였다.
그러다 가끔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려고 하면 내가 사는 곳이 19층 1903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날아서는 안 될, 결코 죽기 위해 날갯짓을 해서는 안 될, 나는 가족과 동떨어진 인간 기러기였다.
원래는 함께 그곳에 가려 했다. 하지만 욕심을 부렸고 그러다 보니 걸리는 게 많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고 나는 한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곁에서 마땅히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를 통해 호스피스를 알게 되었다.
말기암 환자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그리고 그들을 성심성의로 돌보는 곳...
나는 호기심으로 그곳을 찾았고 조금 더 알고자 6개월의 교육을 받고 수료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실천했다. 아버지에게 하던 것을 그들에게 하였고 아버지에게도 못하던 것을 대신 그들에게는 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여읜 후, 나는 이 일에 더욱 매진하였다.
시간만 나면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의 말벗이 되었고 아버지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에게 하면서 나름의 보상심리와 자기만족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득이 된 것은 그 일이 나를 살리는 것이었다.
죽음을 맞닥뜨리면서 내 죽음의 언저리를 생각했고 삶의 본질을 물으면서 내 삶의 막중함과 자긍심을 확보하였다.
나는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 희망을 지폈고 그들의 눈물과 기도를 보면서 내가 가야 할 그 길의 지평을 넓혔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고 그 과정에서 차선과 차악을 가슴으로 품었다. 나를 용서하였고 신께 감사하였다.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히 여겼고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가족이 돌아왔다. 나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호스피스에 있는 그분들과 멀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던 것이 한 달에 두 번으로 바뀌었고 급기야 수개월을 방문하지 않았어도 후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갔고 예전의 기억은 점점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외삼촌의 암 투병 소식을 들었다. 갑작스런 소식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고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잊었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었다.나는 다시 호스피스를 찾았다.
외삼촌이 계시는 지역의 호스피스와 내가 봉사하던 호스피스를 번갈아 방문하였다. 그리고 다시 죽음을 생각했다. 가까운 곳에서 순번을 기다리듯 나를 찾아와 인사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나는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누구와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나의 육신의 장막은 언제 벗겨지고 누구를 만나 그들에게 삶의 혜안을 줄 것인가..
죽음은 우리의 삶을 자라게 한다.
장성한 데까지 그 분량을 충만하게 한다.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 여기지 않고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겠느냐, 라고 내 삶의 방향키를 재 조준하게 한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아름다운 일들이 많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성숙하고 청결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기억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닐까.
그 때 만났던 그 분의 음성을 귀에 걸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그곳에서 OO씨를 만났다. 나는 그곳에서 OO어머님을 만났고 나는 그곳에서 OO아버님을 만났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과 기억에도 담을 수 없는 숱한 말들과 손짓과 약속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얼굴들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 쉽게 죽음을 잊으려 했다. 그리고 나는 맹자의 어머니처럼 죽음이 내 삶을 과중하게 만들 거라 생각했다.
죽음을 외면한다고 내 삶이 경박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안에 선한 양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드높은 태양과 넓은 대양을 보며 향락하는 것도 더없이 좋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삶의 모양이 그것을 한없이 허락하지 않았다. 왜 봉사를 해야 하는지, 왜 삶의 본질과 막중함을 상고하며 살아야 하는지, 다가서는 내 삶의 모양들이 나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게 했다.
나는 봉사의 길이 금욕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기를 모두 잃게 하는 한 알의 밀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봉사는 자원하여 행복한 길을 걷는 것이다. 고민하며 걷기보다 이제 왔구나 하고 내 앞에 놓인 그 길을 지긋이 걷는 것이다..
훗날 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날까 생각해 본다. 누가 내 길을 지켜봐 줄까.
누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누가 내 얘기를 편안히 받아 적어줄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삶을 조망하는 것만큼 익숙한 것이 내게는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깊고 단단한 봉사는 내 삶을 견고히 세워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나에게 허락되는 한, 나는 이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내 삶을 살 듯 살아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