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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사 후 먹는 김밥 한줄, 그 맛은 행복의 맛이었습니다
  • [자원봉사활동수기 | 201807ㅣ글서여름님ㅣ그림김수미님]
치위생학과를 졸업한 나는 대학 졸업 이후 치과에 바로 취직 했다. 1년간 남들처럼 평범하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했다. 치과에서 일을 하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서는 치아 관리가 잘 되는 사람, 치과 상식이 높은 사람부터 관리가 무척 되지 않거나. 치아를 관리하는 방법을 몰라 방치된 안타까운 이들도 많았다. 잘 관리가 되는 사람들을 보면 안도감이 들었고 그렇지 않은 환자들을 볼 때에는 쫒아가서 라도 양치 법을 알려주고 관리를 당부해야 직성이 풀리던 나였다. 일을 하면서부터 언젠가부터 마음속 한 곳에서 '나도 치위생사 면허를 가진 의료인으로서 무언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
1년간 치과에서 기본적인 업무를 경험해본 이후 자신감이 붙어 2년차 때 학과 교수님께 찾아가 치과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나는 장충동에 있는 경동교회 안 선한이웃클리닉 이라는 곳에서 치과의료봉사를 시작했다.
그 곳에는 20년째 꾸준히 치과봉사를 하고 계신 원장님을 뵐 수 있었다. 인자하신 얼굴로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진료를 매번 시행하셨다. 내가 맡은 역할은 3주에 1번씩 일요일 마다 가서 5시간씩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치과치료를 해주는 봉사의 진료 보조 역할이었다. 구성원은 의사 두 분과 어시스트 역할을 맡은 내가 전부였다. 나는 보조 역할을 홀로 모두 처리해야 했기에 온갖 잡일은 도맡아 해야 해서 일손도, 시간도 부족한 열악한 환경이었다. 일요일 1시부터 진료가 시작이었는데 이 진료를 받기 위해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12시 한참 전부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하루에 15명 이상의 환자를 받을 수 없는 환경 이었다는 것이다. 선착순 15명 이내에 들지 못한 이들은 다시 치아 통증과 함께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 참담한 표정과 마주칠 때에는 나는 죄지은 것처럼 얼굴을 잘 들 수 없었다. 내 몸은 고되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 중 정상적으로 정착한 것이 아닌 불법인 분들은 우리나라에서 치료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간단한 진료를 받더라도 부담해야할 진료비가 무척 비싸 치료를 마다하고 진통제로 마냥 버티거나, 우리나라에 노동을 하러 온 이들은 대다수가 구강 관리에 관한 관리법이나 지식이 전무하여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보조 인력이 많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한번은 친구를 설득하여 데려왔고 후배들 몇 명을 불러 도와달라고 부탁도 해보았다. 하지만 마음이 없는 단기적인 도움은 그때뿐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나 혼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면서 봉사를 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이정도 갖고 뭐 달라지겠어……. 휴…….내 몸만 힘들고 도움 주는 척만 하는 것 같아.지금이라도 그만 둘까?' 라는 자괴감도 잠깐씩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함께 봉사를 하는 의사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더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고, 격려도 받았다. 치료가 끝나고서 한명 한명에게 열심히 관리법이나 증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니 그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맙다고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서 떠나갔다.
진료실 밖을 나가기 전에 나의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고 외치고 나간 아저씨 분들 중 몇 명의 미소를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번에 올 때에는 전보다 나아진 상태로 방문을 하였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교육과 진정성 있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봉사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가족이 있다.
파키스탄에서 온 가족이었는데 할머니, 엄마 그리고 아들 둘(초등학생 1명. 어린이 1명) 총 4명이 진료를 신청했고 우리는 그들 중 3명만 봐줄 수 있었다. 저들 중 한국어가 가능한 사람은 초등학생 첫째 아이밖에 없었다. 가족의 구강상태는 모두 심각했다. 엄마가 구강관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자식들의 구강 관리가 소홀했을 것이고 특히나 단것을 많이 먹는 둘째의 구강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다. 첫째 아들에게 열심히 관리법에 대해 설명하고 가족에게 전달해 달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나는 한시름 놓게 되었다. 현실 속 의료 사각 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 아이들의 실태에 대해 현실적으로 맞딱드리게 되니 마음이 더욱 아려왔다저들도 커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될 터인데 인종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관리가 소홀하다면 대를 이어갈 미래의 후손들의 구강상태까지도 걱정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어떻게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치아 발치 후 주의사항 이나 양치질 하는 법 등에 대한 안내 글을 직접 만들어서 나눠주면서 양치법을 일일이 설명하고 양치를 잘 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내었다.
이렇게 2년간 봉사를 갈 때마다의 일요일은 내게 있어 늘 전쟁이었다. 봉사가 다 끝나고 뒷정리를 할 때즈음이면 나의 다리는 부어있고 머리는 항상 헝클어져 있었다. 하루의 봉사가 다 끝난 이후에 교회 내 식당으로 내려가면 봉사자들을 위한 간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토스트 빵과 김밥 그리고 김치 국이 있었다. 봉사를 열심히 한 후에 의사 분들과 나눠 먹는 김밥은 그 어떤 값비싼 음식과도 바꿀 수 없는 꿀맛이었다. 경동교회에서는 내과. 안과 그리고 치과 3분야에 대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봉사가 마련되어 있다. 항상 치과에 환자가 가장 몰려 봉사가 끝난 이후에 내려가 보면 음식이 다 치워지고 없을 때가 많다. 치과가 항상 마지막으로 진료가 종료되기에 특히 김밥이 없을 때가 많은데 가끔 허탈하기도 하고 서운 할 때도 있지만 나에게 있어 그만큼 봉사 후 먹는 김밥 한 줄이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이자 봉사를 지속할 수 있었던 촉진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봉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항상 뿌듯한 휴일을 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운 발걸음이 날아갈듯이 가볍다. 한번은 봉사 후 남은 김밥을 싸서 지하철을 타려고 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었다. 얼굴을 보니 좀 전에 나에게서 치료를 받고 구강교육도 받고 간 할머니셨다. 할머니의 인사가 고마워 가방 속에 있는 김밥 한 줄을 꺼내 나눠주었다.
안 받겠다고 손 사레를 치셨지만 결국은 활짝핀 웃음꽃 미소와 함께 김밥을 갖고 떠나셨다. 나에게 있어 봉사는 이렇다. 내가 나눌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와 나누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시간 말이다. 봉사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쌍방의 소통의 교류였다는 것을 말이다. 2년간의 치과 보조 봉사를 마치고 현재 나는 다시 치과에서 열심히 근무 중이다. 환자 한 분 한분의 구강 건강에 신경 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