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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만의 정상
  • [자원봉사활동수기 | 201807ㅣ글최연화님ㅣ그림조주희님]
대학시절,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하던 저는 자원봉사활동을 자연스럽게 접했습니다. 첫 자원봉사활동으로 장애인복지시설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장애인의 맑고 순수한 마음에 매료되어 장애인복지 분야를 전공으로 삼고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자원봉사를 매주 실천했습니다. 그중 지금가지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자원봉사활동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원정대’라는 이름으로 떠나는 등산프로그램입니다. 매달 1회, 장애인 이용자와 비장애인 봉사자가 짝꿍이 되어 전국 각지의 산을 오르는 단체 활동이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자원봉사자로 지원하고 난 후, 4월 경 복지관 이용자들과의 첫 등산을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만나기도 전에 참여 대상자는 발달장애인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장애인들은 등산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담겨있는 생각이었습니다.
비어있던 자리를 한 두 분씩 채워가기 시작했고 놀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자리에는 발달장애인은 물론 지체장애나 뇌병변장애를 가진 장애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놀람과 동시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산을 오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의구심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의 짝꿍은 자폐성장애를 가진 10대 후반의 여자 동생으로 매칭 되었습니다.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리고 왜소해 보이던 동생은 오로지 손에 들고 있는 책에만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저의 소개도 하고 언니라는 호칭도 알려주고 창 밖의 풍경을 보며 말도 건네어봤지만 여전히 책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동생이 갑자기 저에게 책을 건네었습니다. 저는 이를 빠르게 건네받고 난 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습니다. 동생은 두 손바닥을 겹쳐 앞으로 내밀며 “주세요.”라고 어눌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책을 다시 두 손에 쥐어줬습니다. 이 행동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수시로 반복되었고 저는 곧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동생의 놀이이자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동생과 마음으로 소통하기 시작할 때 쯤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으로부터 식사와 간식을 배분받고 정상까지 오른다는 목표를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무리해서 정상까지 오르지 않아도 되며 할 수 있는 만큼만 올라오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못 올라오는 팀은 중간 중간 전화로 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자 힘차고 빠르게 달려가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천천히 한 걸음 한걸음씩 걸어가는 분들이 있고 처음부터 오르기를 거부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다리가 불편한 이용자들과 팀이 되어 나란히 걸어갔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이용자들은 남자 봉사자들이 힘으로 균형을 지탱해주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내딛어 가며 걸었습니다.
제 짝꿍인 동생은 산을 걷는 내내 책 보기, 책 접기, 책 펼치기를 반복했습니다. 땅을 보지 않아 넘어질 뻔 한 적이 많았고 저의 잦은 주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에만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저는 동생의 팔짱을 낀 채 걸어갔고 팔 힘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았습니다. 함께 팀을 맞춰 가던 옆 자원봉사자분이 제 짝꿍을 보더니 작년에도 참여했었으나 산을 잘 오르지 못했고 항상 산 중턱쯤 가서 점심식사를 한 후 먼저 돌아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산 중턱 쯤 가자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후 동생은 다시 산을 오르길 거부하였고 휴식을 취하다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차에 먼저 도착하여 정상을 찍고 온 팀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단체사진도 보았습니다.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에 아쉬웠으며 다음에는 동생에게 정상을 보여 주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두 번째 만남이 되었습니다. 저는 반갑게 동생을 맞이하였고 동생은 첫 만남 때와 같이 낯설어 했습니다. 차에서는 여전히 책을 주고받는 놀이가 시작되었고 저는 조금 더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으며 교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산을 오를 시간이 되자 저희는 어김없이 후발 팀이 되어 걸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기에 동생에게 잦은 격려와 응원을 하며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빠르게 산 중턱까지 잘 올라왔습니다. 이후 정상으로 가기 위해 조금 더 오르다보니 넓은 주차장과 휴식공간이 보여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잠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동생이 주차장에 있는 대형버스를 보더니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빠르게 쫒아갔습니다. 대형버스 앞에선 동생은 버스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이를 버스 기사님과 제가 말리자 큰 소리로 울음을 보이며 몸부림 쳤습니다.
차를 타고 가고 싶다는 욕구로 보였으며 대형버스가 저희가 타고 온 버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평소보다 더 무리해서 올라온 탓이었을까요. 동생은 버스들이 있는 주차장을 떠나지 않고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고 저는 너무 당황스러워 달래기 바빴습니다. 우선 인도로 동생을 이끌었고 후발 팀에 이야기하여 저희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후 동생과 저는 몇 차례 버스로 달려들기와 말리기를 반복했고 선발팀이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서 저희를 발견하여 함께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내내 동생은 서럽게 울었고 저는 이를 달래며 저의 욕심으로 동생을 힘들게 이끌었던 행동을 반성했습니다. 더 이상 저는 무리해서 동생을 정상으로 이끌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땀을 흘리면 닦아주고 숨이 가빠지면 물을 건네고 쉬어가며 동생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오르길 응원했습니다. 제가 재촉하지 않아도 동생은 한 달 한 달, 조금씩 더 앞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째 등산이었을까요, 동생이 그날따라 선발대와 후발대의 중간쯤에서 힘차게 걸어갔습니다. 여전히 손에는 책을 쥐고 책 보기를 반복했지만 발은 열심히 굴렀습니다. 숨이 가빠지고 땀이 몸을 적시 듯 흘러내렸습니다. 마치 자신 스스로와 싸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묵묵히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정상을 앞에 두었습니다. 앞선 이들의 격려와 뒤 따라오는 이들이 응원을 받으며 마침에 정상에 발을 딛을 때 환오성이 터졌습니다.
산 정상에서 한 번도 본적 없는 동생의 얼굴이 보이자 다들 박수와 환오로 맞이해주었습니다. 저는 감동스러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고 동생을 요란하게 칭찬하며 힘차게 포옹했습니다. 동생은 담담한 모습이었지만 살며시 웃으며 기분이 좋아보였습니다. 한 손에는 책을 꼭 쥐고, 한 손으로는 ‘v’를 취한 채 자신을 찍었습니다. 정상에서 함께하는 첫 단체사진이었습니다. 열 번째의 등산이 마무리 될 동안 동생이 다시 정상에 다다랐던 적은 없습니다
그저 매 순간 스스로의 최선을 따랐고 저는 이를 응원했습니다. ‘희망원정대’가 마무리 되던 날, 동생과 저는 평소보다 조금은 더 오래 눈을 마주했고, 특별한 감동을 선사해준 동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매달 하루, 10개월 동안 총 10일간의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자만과 욕심에 부끄러웠고, 선입견과 편견에 반성했습니다. 3년이 지난 현재, 저는 사회복지사로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종종 그때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동생과 같은 장애인을 볼 때, 스스로의 한계와 싸우는 장애인을 볼 때, 장애인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럴 때면 장애인 당사자와 관련된 부모님이나 관계자 상담에서 이런 말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이 아닌, 자신만의 정상에 오르고 있을 겁니다. 조금씩 자신의 정상을 높여가며 저기 우뚝 선 산처럼 세상에 우뚝 서고자 노력하는 중일 겁니다. 그 노력에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