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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래 피어난 한 달간의 소중한 기억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807ㅣ글최국환님ㅣ그림조주희님]
4월 초순, 꽃들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봄은 바지런한 바람으로 다가왔고, 이내 그 바람에 어디론가 아련히 실려 갈 것이다. 그런들 어떠하랴!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는 이곳 고흥의 봄은 지붕 없는 미술관의 모습으로 모두의 마음을 달래주기 충분한 계절을 맞고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다섯 시,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집에서 5분 거리의 사무실로 향하는 길, 작은 소망을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예전에 담았던 초심(初心) 또한 하루 내내 변치 말아 달라고!
아내의 적극적인 권유와 지극한 정성으로 오픈한 고흥 작은 읍내에 자리한 재가복지센터 주변에도 봄이 그득했다. 막 피어 고개 떨군 동백이 그랬고 사방에 흩어져 내리는 벚꽃 향기마저 그런 다짐을 다잡아주고 있었다.
작년 찔레향이 코를 찌르는 5월 말경,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씨였다. 사무실을 개설한지 얼마 되지 않는 탓에 어디로 향할지 정해지지 않은 발길엔 그저 땀만 가득 차올랐고 마음 또한 조급함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그렇다, 서울서 때어나 50년을 살았던 우리부부에겐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고흥반도는 그야말로 외지나 다름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사나흘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던 끝, 인근 마을 이장님을 통해 소개받은 87세의 어르신과의 첫 상담이 이뤄졌다. 오래전 지어졌을 법한 시골가옥에서 홀로사시는 어르신, 재취로 시집온 어르신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허리는 아픔으로 굽어 하늘을 향하셨고, 몹쓸 지병으로 두 다리마져 망가진 체 꼼짝 조차하기 힘드신 상태로 이웃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시는 상태이셨다.
망가진 체 꼼짝 조차하기 힘드신 상태로 이웃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시는 상태이셨다. 집 앞 작은 텃밭에서 힘겹게 거두신 채소를 다듬는 두 손은 거북 등껍질처럼 이미 굳어 있었고 웃음기 없는 얼굴엔 팔십 평생을 힘들게 살아오신 당신의 여정이 거칠게 그려진 지도처럼 주름져 있음에 그저 안타까운 심정으로 장기요양등급을 받기위한 서류가 꾸며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보름쯤 후에 장기요양4등급 판정을 받으셨고 우리센터의 첫 수급대상자로 등록이 이뤄졌다.
한두 달이 지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간 굳었던 어르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정성으로 방문하시는 요양선생님을 딸로 삼으셨다는 자랑을 서슴없이 이웃에게 전하신다는 말도 들었다. 간혹 방문하는 내게도 정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사과 한쪽이라도 내게 건네셨고 항상 교통조심하고 건강 하라 전하시는 말씀은 돌아가는 길가에 푸근한 향기로 퍼지곤 하였다.
그리 어르신을 모신지 9개월쯤 되던 날, 그간 어르신을 돌보시던 요양선생님께 뜻밖의 일이 생기셨다. 허리디스크 수술로 한 달 간 병원치료를 받으셔야 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야말로 답답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리 치료를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정 나누기가 어려우신 어르신의 표정이 이내 굳어지시며 눈물을 지으시는 것을 보니 그간 두 분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양선생님의 친정어머님이 장기간 요양원신세를 지시는 관계로 어르신을 뵐 때마다 어머님생각이 난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부모님 생각에 집에서 준비한 음식이며 간식거리를 바지런히 나누기도 하고 빨래또한 일주일이 한두 번씩은 직접 집에서 빨고 말려 오심에 항상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리 돌봐주던 딸 같은 선생님이 수술을 하고 한 달간 자리를 비운다 함에 어르신의 마음은 걱정과 허전함이 가득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입원을 이틀 남긴 날, 아침 일찍 어르신을 찾아뵙고 말씀을 전했다. “어르신, 요양선생님 대신에 아들 같은 제가 당분간 돌봐드려도 되나요?” 대답 대신 어르신의 두 손은 어느새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웃음 띤 얼굴을 보여주셨다. 천만 다행이었다. 내심 거절하시면 어쩔까? 필요 없으시다면 어찌할까?
하는 고민도 해봤지만 그저 기우였다. 또한 2년 전 취득한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2월을 막 넘긴 3월초, 아직 추위가 한참동안 머물고 있었다. 찬물에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가 없는 관계로 이삼일에 한 번 씩 찬물로 빨래를 해야 했지만 그리 춥지 않았던 것은 고맙고 감사하단 말씀을 늘 상 하시는 어르신의 보살핌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리 보름쯤 지났을까! 평소 말씀이 없으시던 어르신께서 조금씩 내게도 마음을 열어 주셨다. 나에 관한 이것저것을 물어 오심은 물론이고 당신의 힘들었던 지난 과거사며, 살아오셨던 그간의 여정을 조금씩 닫혔던 주머니 속에서 풀고 계신 것이었다.
한 달간 사무실을 잠시 비우더라도 요양선생님을 대신해 어르신을 돌봐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도움을 드렸던 것보다 어찌 보면 내가 어르신에게 받은 것이 더욱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센터와 수급자의 관계 이상의 그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얼마 후, 수술도 무사히 잘 되었고 어느 정도 치료를 마치셨다는 선생님의 소식이 전해졌다.
4월 첫 주부터 출근이 가능하시다는 말씀에 반갑기도 했지만 왠지 서운한 마음에 어르신 집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있어야할 자리에 없는 것들이 스쳐지나갔다. 홀로되신 그분의 반평생에 재산은 고사하고 남겨진 자식들마저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당으로 눈이 향했다. 4월을 맞이하는 계절,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터지고 있다. 시멘트로 칠해진 이곳 어르신의 작은 마당이 더욱 답답해만 보였다. 어르신에게 남은 여생을 같이할 친구가 필요했다. 살아계심도 느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시멘트 공간을 허물기로 결심했다. 한 평 정도의 화단이어도 충분했다. 작년에 심었던 우리 집 화단의 수선화 튤립 몇 개도 옮겨심기로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진 않겠지만 꽃 한 송이 어르신 마음에 옮겨 드릴 수 있다면 그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한 달간 내게 소중함을 깨우쳐주신 어르신에 대한 작은 보답보다는 가끔 어르신과 같이 물을 주고 그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고픈 나의 작은 소망일지도 몰랐다. 한 달간의 짧은 일정이 끝나간다. 사흘 후면 선생님도 예전의 모습으로 어르신을 돌봐드릴 것이다. 내게 건네주셨던 어르신의 마음을 향기로 피우고 싶었다. 몰래 피어 소중한 기억으로 준비될 작은 화단엔 어느새 은은한 꽃 향이 멀찌감치 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