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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운 어머니와 아들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807ㅣ글이민영님ㅣ그림최민지님]
장애가 있는 70대 노모와 몇 년째 거동이 불가능해 방에서만 지내고 있는 아들이 있는 가정을 도와달라는 지역주민의 요청으로 가정방문을 갔다. 40여년이상 된 구옥의 방 한쪽 구석에는 소주병 3개와 담배, 소변통으로 사용하는 생수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야구중계방송이 나오는 TV를 보고 있는 50대 초반의 남자와 70대의 어머니가 계셨다.
낯선 이들의 방문에 남자는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어머니께서는 언어장애가 있어 말씀을 거의 하지 못하는 형편이셨다. 방문 첫날에는 국민기초생활수급신청에 대한 안내를 하며 전반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머니께서 뒤따라 나오셔서 영문을 여쭈었더니 놀랍게도 어머니는 아들의 술을 사러 편의점에 가야 한다고 하며 그러지 않으면 아들이 화를 낸다고 손을 내저으며 말씀하셨다. 어머니에 대한 폭력이 의심되는 상황으로 빠른 시간 내에 재방문을 약속드렸다. 여러 차례의 가정방문과 주변 이웃들과의 이야기를 통하여 알게 된 가정의 상황은 이러했다. 어머니는 오래전 할아버지와 사별하시고 홀몸으로 삼형제를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큰아들은 5~6년 전 사업을 하다 집을 나간 후 소식이 끊겼고, 막내아들은 이혼 후 아이를 키우며 근근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함께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은 택시운전을 하다가 3년 전 친구로부터 국제결혼을 제안 받아 진행하던 중 상대 여성이 친구와 결혼을 하는 상황을 겪으며 충격을 받아 술에 의지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부터인가 다리가 저리기 시작해 시간이 지나자 일어설 수조차 없게 되어 방안에서만 기거하게 된지 2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수 년 전 심혈관질환으로 대수술을 받으신 후 언어4급과 뇌병변 3급의 중복장애를 가지고 되신 상태셨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어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해 아들의 간병과 가사를 도맡아 하셨는데, 70여 미터정도 떨어진 편의점까지 오가는데 10분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아들은 맨 정신으로는 하루하루가 힘들어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술을 먹는다며 도움을 주려는 주변 이웃들과 기관 관계자들의 손길을 거부하며 강한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 신청 및 책정으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안정장치를 마련한 이후 매월 생계비가 지원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던 중 어머니가 사례관리사의 손을 붙잡고,
“아들이 너무 불쌍해. 소리 지르고 화는 내지만 나쁜 아이가 아니야. 너무 불쌍해. 우리 아들 좀 도와줘.” 라고 하시며 그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 내셨다. 어르신의 눈물이 너무나 절절해 그 손길이 잊혀 지지 않아 제시하는 모든 것에 부정적인 아들에 대한 개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간절함을 아들에게 전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의료원 신경과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동이 불가한 175cm가량의 성인 남성의 병원진료를 위해 관내 복지관에서 휠체어를 대여하고 휠체어가 실리는 차량 배차와 이동지원을 위한 공익요원을 갖추어 의료원 진료를 진행했으나 신경과와 신경외과의 협진이 필요했던 아들은 아무소득도 얻지 못한 채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냉소적이기만 했던 아들이 병원진료를 결심했고, 아들이 진료를 받던 날 어머니는 아들이 병원에 갔다는 그 사실이 너무 좋았고 이제 아들이 나을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대문 앞에서 하루 종일 아들을 기다리셨던 어머니의 바램이 너무 절실했기에 아들의 대학병원 진료를 시작했다. 1~2주 간격으로 검사와 결과확인을 반복하기를 2개월, 아들은 벽을 집고 이동이 가능할 정도의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완치를 위해서는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수술에 대한 후유증을 어머니를 통해 경험한 아들은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아들의 병원진료가 호전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돌봄 자원 확보를 위해 건강보험공단에 노인 장기요양보험을 신청했고 1달여 후 요양보호사선생님이 가정에 파견되어 어머니의 돌봄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제 가정은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아들과 어머니도 이제는 사람처럼 사는 것 같다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배가 아프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에 간 아들에게 의사선생님은 암이 의심된다며 대학병원에 빨리 가보라고 했고, 급하게 연락을 받은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로 향했다. 그리고 췌장암 말기라는 청청벽력 같은 진단명을 듣게 되었다. 통증이 매우 심했을 거라는데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는 와중에도 딸도 아닌 다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수고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아들이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수차례 이야기하셨다. 이후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중환자실에서 다시 일반병실로 옮기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결국 어머니는 영면하셨다. 어머니가 병마와 싸우는 동안 아들은 수없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이제 그만 보내드려야 될 때가 왔다는 의사의 이야기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갔었다.
그동안 본인이 너무 무지해서 아픈 어머니에게 2년이 넘는 시간동안 병수발을 들게 한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을 하며 이제라도 어머니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며 휠체어를 타고 병실을 지켰었다. 그러나 결국 아들은 어머니를 보내드려야만 했다. 어머니의 사모제를 지내고 아들은 한동안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먹고 전화를 했다. “이제 속이 시원하네요.”
나는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도 할 만큼 한 것 아닌가요?” 아들의 목소리가 흐느끼고 있었다. “나도 고생 안 해도 되고 노인네도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되니 다 잘된 것 아닙니까?” 그는 버럭 화를 내더니 이내 힘없이 작게 읊조렸다.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얼굴이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어요, 흐흑. 고생 많았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선생님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혹시 마음이 너무 힘들어 극단의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동안 도움을 주셨던 여러 기관과 자원봉사자 분들과 아들의 상황을 공유하고 지지체계를 만들기 위한 개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상실한 아들은 병원진료도 거부하고 알코올에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 많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왜 아들은 주변 사람들의 염려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곁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을까? 그로부터 1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궁금하다. 아무리 힘든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그 슬픔의 정도가 옅어지기 마련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내 곁에 있다.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했던 장소를 지날 때, 혹은 어머니와 비슷한 연령 어르신을 만날 때 그들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의 만남을 ‘과거’라는 말로 넘겨버리지 않고, 생각나면 생각이 나는 대로 내버려두며 추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앞으로 좀 더 현명하고 따스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면 어머니와 아들도 하늘에서 나를 보고 웃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