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가정이 흔들리면서부터 내 삶은 혼란에 빠졌다. 하여 나는 살기 위해 급박하게 집과 5분 거리에 위치한 지역아동센터의 생활복지사로 취직을 했다.
이곳의 환경은 나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센터의 환경은 마치 1970년대를 연상하게 할 만큼 낙후된 환경이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센터장님의 전화에 나는 곧바로 “네”라고 화답을 했다.
그 당시 나는 평정심을 잃어 정확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있었다. 나의 몸과 생각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분리 되어있는 상태 그 자체였다. 면접을 보고 곧바로 20일부터 근무를 하게 되었다.
첫 출근을 하는 날 마침내 모든 것이 정확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은 너무 낡고 오래 되었으며 화장실은 얼마나 오랫동안 청소를 안했는지 구린내와 썩은 냄새 그리고 소변 냄새가 서로 또아리를 틀어 합이 되어 참으로 역겨웠다.
센터의 출입문은 누가 발로 차서 휘어졌는지 10cm쯤 들떠있었고 센터의 모든 가전제품은 20년도 더 넘어 보였다.
엄청난 굉음소리를 가진 냉장고는 센터 아이들이 먹을 식재료를 보관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곧바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낡은 싱크대 바닥은 몇 천 년 동안 누적된 기름 덩어리와 음식물이 겹겹이 쌓여 봉긋하게 솟아 있는 형태가 마치 묘지를 연상케 했다.
쌀을 보관하는 창고는 귀신이 10명쯤은 숨어 있을 것만 같이 음산하였다. 무엇보다 그 겨울 센터 창문은 제 역할을 정말로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은 나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여과 없이 쳐 들어와 내 온 몸을 돌덩이처럼 얼어붙게 만들었다.
떨었고 떨었으며 나의 몸이 90% 굳어갈 쯤 퇴근시간이 되었다. 급식을 담당하는 인력이 없어 나는 급식과 학습 그리고 모든 제반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면 나는 돌덩이 같이 얼어 굳어 버린 몸을 그대로 이불속에 짚어 넣고 잠들기 일쑤였다. 내 삶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의 근무지에서 나는 그렇게 한 달 두 달을 견디고 또 버텨야만 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태양은 좀 더 괜찮은 모습으로 나를 녹여 주었다.
이른바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이 센터 창밖으로 나처럼 혼자 서있는 한그루의 목련 나무에 목련 꽃이 피면서부터 시작되어 졌다.
나는 이 환경에 조금씩 적응을 해 나아갔다
센터의 아이들은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어 치웠으며, 먹고 또 먹고도 배가 고프다고 외쳐댔다. 언어와 행동 또 한 매우 거칠었고 생각도 몹시 부정적이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나는 일단 환경 개선을 위해 2015년 봄부터 여기저기에 프로포절을 쓰기 시작했다.
먼저 새 컴퓨터가 선정이 되었고, 이어서 TV, 냉장고, 스텐드형 에어컨, 벽걸이 에어컨, 책상과 의자 그리고 튼튼한 다리를 가진 씽크대, 소음이라고는 1도 없는 멋진 양문형 냉장고와 시원한 김치를 보관해 주는 김치 냉장고 그리고 나이트클럽을 연상케 하는 깜빡거림이 심했던 형광등은 한전KPS에서 LED로 센터의 모든 전등 기구를 교체해 주었고, 식기 세척기와 식판 소독기 아참 무엇보다 수 천년도 넘었을 것 같은 누르스름한 플라스틱 식판도 스테인레스 식판으로 전부다 교체가 되었다.
센터의 거의 모든 물품들은 새롭게 다 교체가 되었다. 나는 3년 동안 아주 소소한 것에서부터 부피가 큰 것에 이르기 까지 150건의 프로포절을 작성하여 여기저기에 지원을 했고 이로 인해 나의 손가락 지문은 다 지워질 지경이었다.
2017년 12월 마지막으로 선정된 항목은 희망 나눔의 화장실 개보수 올수리 비용에 선정된 것이었다.
나는 일에 미쳐서 살았고, 그 미쳐서 살고 있었던 그 3년이라는 시간은 나를 살게 만들어 주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거칠고 심난했던 센터 아이들은 조금씩 온화해 지기 시작했다.
웃음 보다는 화를 내거나 폭력 및 폭언을 더 많이 사용했었던 우리 아이들이 아주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거칠었던 언행의 빈도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좀 더 배려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출근하는 길이 그렇게 싫었으며 한 숨 뿐이었던 나의 출근길은 마침내 콧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3년 만에 센터 환경은 아늑해 졌고, 포근해 졌다. 부드러워진 환경은 우리 아이들을 점점 변화 시켜갔다. 폭력성이 강했던 아이는 유순해 졌고, 소심했던 아이들은 자존감이 올라갔으며, 협조를 못했던 아이들을 점차 협조를 해 주었고, 매너를 지켜 주었다.
척박했던 센터에 작은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후원기관 덕분이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나는 현재 지금의 환경에서 너무나도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렇게 오기 싫었던 센터 출근이 이제는 너무나도 행복한 일터가 되어 주었다.
우리 아이들 한명 한명은 내가 외로움을 느낄 사이도 없게 만들어 주었으며, 나에게 가지각색의 행복과 즐거움과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가한 그 어떤 시간의 여유도 주지 않아 나를 일만 하면서 살게 해 주었다.
오늘도 나는 21평의 작은 공간에 사랑을 가득불어 넣어 놓고 우리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명 한명의 아이들은 제각각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가끔 퇴근하고 힘들어 집에 쓰러져 누워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문자 메시지들 “잘자요” “힘내요” “사랑해요” 라는 문자들이다.
그 순간 나는 세상 그 어떤 행복한 사람들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 된다. 나도 사랑받고 살고 있고 사랑해줄 19명의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부자가 된다.
센터의 종사자는 센터장님과 그리고 생활복지사인 내가 전부이다. 그래서 나는 휴가도 없다. 1년에 한번 여름휴가 단 1일이 나의 꿀 같은 휴가의 전부이다.
나는 아프면 안 된다. 센터의 근무환경은 열악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열악할 것이다. 적은 급여와 열악한 환경 하루에도 수천번 수만번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우리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만 둘 수가 없다.
센터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선생님 하는 그 모습에 나는 또 하루를 그리고 한 달을 일 년을 그렇게 버티고 살아가고 있다.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그렇게 나는 4년째 근무를 하고 있다.
내 자리에 근무했던 많은 전 직원들은 한달 아니면 15일 아니면 3개월 최고로 길게 근무한 여직원이 11개월 이었었다. 나는 그들보다 인내심이 더 없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데 생계를 위해서 하루를 이틀을 견디고 버티다 보디 훌쩍 4년째가 되었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을 지도하는 내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우리 아이들은 나를 위해 3행시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하교길에 박지영선생님의 3행시를 읊어 준다.
박 : 박지영선생님은
지 : 지구에서
영 : 영원히 착하고 아름답게 살 것이다.
라고...
나에게는 두 딸들이 있다. 늘 아쉬웠던 점은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근무하는 센터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95%가 아들들이다. 나는 마침내 아들 부자가 되었다.
“부자” 너무나도 나를 든든하게 만들어 주는 말이다. 아들 부자.
나는 말 그대로 아들 부자다. 아들 부자......!! 사람이 재산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우리 아이들.. 센터 아이들은 나의 엄청난 재산이 되어 주었다.
우리 아이들은 약속해 주었다.
“성장해서 선생님께 꼭 효도할께요” 라고 하여 나는 엄청 난 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