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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원봉사활동수기 | 201904ㅣ글김영은님ㅣ그림오예슬님]
“선생님 주말 잘보내세요” 나는 매주 일요일에 5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이 문자를 받았다. 토요일도 아닌 주말이 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문자를 받지 못하는 날에는 마음 한 켠이 서운해지기까지 한다. 어느 평범한 대학의 공대생인 나는 2주에 한 번 ‘선생님’이 된다. 그것은 나의 대학 생활에 큰 행복이다.
여름 햇빛마저 낯설었던 스무 살의 여름 처음 만나, 모든 게 그대로 인 줄 알았는데 벌써 다섯 해를 함께 보냈다. 처음에는 이제 막 20대가 된 내게 여태껏 불러 보기만 했던 호칭을 듣고 있으니 어색했지만, 여전히 공감하며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고 즐겁다. 나는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이 좋다. 그런데 이렇게 밝은 미소를 가진 아이들은 진짜 아이가 아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어른 아이, 발달 장애인들이다. “선생님 패스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최대의 난제 앞에 놓여진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팔을 벌리고 나의 공을 기다린다. 처음에는 가장 키가 작은 아이에게 던져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답이 되지 못했다.
5년의 경험 끝에 드디어 나는 답을 찾았다. “자! 선생님 공 뺏는 사람이 임자!” 아이들은 반달 같은 눈웃음을 하며 나에게 우르르 몰려온다. 절대로 공을 일부러 넘겨주는 티가 나서는 안 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공을 빼앗긴 선생님이 되곤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봉사활동을 시작했지만, 대학에 와서는 조금 더 활동의 주체가 되어 자율적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농구를 좋아하고 장애인 봉사활동을 다년간 해온 덕분에 발달 장애인 농구 봉사 동아리 “000 농구단”에 가입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쳐 주고 소풍도 다니며 아이들의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었다. 이 활동을 시작한 첫 해, 나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서였는지,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나조차도 아이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5년 전 가을, 30명의 아이들과 함께 프로 농구 경기를 관람하러 갔었다. 항상 체육관 안에 우리끼리 있다가 함께 밖으로 나간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은 기대에 들떠 있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걱정이 앞섰다.
혹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하는 근심이 끊이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장을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부터 일은 터졌다. 내가 잠시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저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고, 그 곳에는 어느 여성분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계셨고, 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그 때 들었던 대답은 아직까지 나에게 충격으로 남아있다. “아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제 팔을 더듬는데 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외관상으로는 크게 불편하다고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기에 여성분도 많이 놀라셨을 것은 알지만, 더듬었다는 표현을 듣자 나도 어쩔 줄을 몰랐다.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하다는 말 뿐이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불편한 사람 같아 보인다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 상황에서 나는 놀란 아이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지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은 제가 책임자입니다.” 라며 자신 없게 이야기했다. 내가 과연 이 무게를 책임질 수 있을까하는 걱정뿐이었다. 불편한 아이들이 아니라, 단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다행히도 상황은 정리가 되었고, 우리들은 경기장에 도착했다. 나는 지하철에서의 일이 계속해서 신경이 쓰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새 다 잊고 경기장을 보고 신난 아이들의 즐거운 마음과는 달리,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걱정만이 가득했다. “우리 팀 이겨라! 패스! 패스!” 아이들은 큰 소리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였고, 큰 소리로 응원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나는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제야 내 어리석은 모습을 대면할 수 있었다. 나조차도 이 아이들이 무슨 일을 벌일까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봉사 활동을 할 자격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길게 자라난 손톱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아이들에게 해준 것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로 이 아이들을 웃게 해 줄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결론은 ‘아이들의 격 없는 친구가 되자’였다. 봉사자와 대상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 평소에도 서슴없이 연락할 수 있는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아이들, 아니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정신없이 바쁜 대학교 새내기 시절을 보내는 와중에도, 2주에 한 번 돌아오는 이 친구들과의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불꽃처럼 뜨겁던 스무 살을 보내고, 나는 이 행복을 잠시 뒤로한 채 입대를 하게 되었다. 군인이 되고 나서 나는 당연히 이들에게서 잊히게 될 줄 알았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할 것이고, 사회로 돌아온 후에도 다시 그 활동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걱정은 되려 큰 감동이 되어 돌아왔다. 전역을 1년 남짓 남긴 어느 날, 휴가를 나와서 보니 친구들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왜 안 와. 보고 싶어요.” 농구 대회를 나갔다 왔던 모양이다. 마침 그 주 주말이 활동 날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4박 5일의 짧은 휴가 중이었지만, 서울로 가는 KTX를 예매했다. 1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나 혼자였다.
짧은 머리를 보고 친구들이 웃었다. 그 웃음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머리로 변한 나였음에도 기억해 주고 기다려 준 사실에 행복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돌아와서 꼭 다시 이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좋은 친구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부대에 돌아와서 일기를 썼다. “내가 나눈 만큼 내 행복이다.” 그 때 내 일기장에 쓰인 한 마디 문장이, 지금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작년 2월 전역 후 사회로 돌아와서 나는 이 동아리의 대표가 되었다.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다며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나를 기다려 준 친구들에게도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었다. 이제는 이 동아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친구라는 행복한 말까지 듣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이 활동을 봉사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면서도 더 이상 발달 장애인들은 우리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나와 함께 세상을 걸어가는 그 누군가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선생님이 되기에 자격이 있나 수십 번 되뇌어 보았으나, 그렇게 매년 똑같은 웃음과 즐거운 표정 보여주면 그걸로 됐다. 나 또한 그 하나로 충분히 행복하고 넘치도록 감사하다. ‘불꽃슛’이라는 유치한 이름만큼 나도 여전히 유치하게 함께이고 싶다. 앞으로도 함께 웃고 함께 즐거워하며 그렇게 함께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