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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술실에서 수화로 전한, 사람의 따뜻함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904ㅣ글김영실님ㅣ그림오예슬님]
대학을 졸업한 해, 나는 대학병원 사회사업실에서 수련 의료사회복지사로 일을 하게 되었고, 잘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고.. 내가 만나는 모든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벅찬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1년간의 짧은 수련 기간 동안, 나는 ‘무연고 어르신 퇴원 연계, 30대 편마비 환자의 주거개선 지원, 신경정신과 환자들과의 치료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진행, 소아과 환아의 진료비 지원까지..’ 하루하루, 사회복지라는 뿌듯한 마음이 가득한 시간을 보내었다. 그렇게 수련 기간을 마치고 근무하게 된 곳은 암 환자 분들이 주로 치료를 받는 종합병원이었다. 이제 막 암 진단을 받으신 분부터 여러 차례 항암치료를 포함한 치료를 받으시는 분, 호스피스 돌봄을 받으시는 분 까지.. 그 큰 병원의 환자분들은 대부분 암 환자분들이었고, 나의 새로운 직장생활은 의료사회복지사로서의 열정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아프고 힘든 환자분들과 그들을 간병하느라 지쳐가는 가족분들과 보내는 시간이 계속 될수록, 나의 그 기대감과 열정은 점점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환자분들은 암을 치료해주지도, 통증을 조절해주지도, 주사한대 놔 주지 않는, 사회복지사와의 만남이 익숙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환자분~ 치료 받느라 힘드시죠.. 이번에 담당의사선생님이 저희 사회복지팀에 환자분의 상담을 의뢰해주셨는데요..” “상담이요? 아.. 아니 괜찮습니다.. 좀 쉴게요.. ” “아.. 네... 다음에 다시 올게요.. 힘드시면, 쉬세요..... ” 상담을 하고, 필요한 부분을 채워드리고, 사회복지사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싶었지만, 환자분들이나 가족분들의 마음을 열기는 쉽지가 않았다. ‘난, 사회복지사로서 자질이 없는거 같아.. 내가 해줄 수 있는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 이런 생각으로, 자괴감에 힘들어지고 환자분들과 가족분들을 만나는 게 불편해지기만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퇴근을 앞둔 시간,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네, 사회복지팀 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외관데요.. 혹시, 선생님 수화 하실 수 있으세요?” “수화요? 대학 때 수화를 좀 배우긴 했는데요.. ” 외과에서는 다음 주에 수술을 하는 환자분이 청각장애인이신데 수술을 앞두고 많이 불안해하신다면서, 수술실에서 간단히 수술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해드리고 불안해하지 않도록 수화로 전해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을 전했다.
나는 사실, 전문적으로 수화통역 자격이 있지도, 오랜 기간 수화를 해보지 않아서 능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불안해하실 환자분을 생각하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수화를 할 수 있으니 내가 수술실로 가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졸지에.. 몇일 후면 청각장애인 환자분과 의료진의 수화통역을 해야만했다.. “아.. 어떡하지? 못한다고 할 걸.. 대학때 해보고.. 다 잊어버렸는데.. 게다가 통역을.. ” ?사회복지사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힘들어하고 있던 그 때.. 나에게 숙제하나가 떨어진거다.. 나는, 어떤 말을 전해야 하나 걱정과 함께 주말 동안 열심히 수화를 연습했다.
수술 당일, 나는.. 수술실 가운을 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환자분은 50대의 남자분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으셨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많이 탔고.. 통증으로 식사를 잘 못하셔서 매우 마른 체구셨다.. 다행히 초기에 암을 발견해서, 수술을 받으시고 치료를 잘 받으시면 예후가 좋으시다고 하셨다. 진료시에는 가족분 들이 항상 옆에 계셨지만, 수술실에서는 혼자 계시니.. 의료진의 설명을 듣지 못하셔서 많이 불안해하셨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복지사에요..” 수화로 인사를 드리자, 수술 침대에 누워계시던 환자분은 잠깐 놀라시는 듯 했지만, 이내 밝은 얼굴로 웃으면서 인사를 해주셨다. “환자분, 이제 곧 수술을 받으실거에요.. 마취를 하실꺼구요.. 수술을 잘 끝날 거에요..” 환자분은 많이 긴장하셨지만, 감사하게도 나의 부족한 수화도 잘 이해를 해주셨고, 내 손을 꼭 한번 잡아주셨다.
그날 환자분의 수술은 잘 진행되었고, 일주일간 입원치료를 받으신 후 에는 퇴원을 하실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셨다. 퇴원하시는 날, 병원 입구에서 한결 밝은 얼굴의 환자분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늘 퇴원하시는거에요? 환자분이 회복이 빠르신거 같아요.” “아니에요.. 다들.. 고마운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술실에서 누워서 있을라니, 무섭고.. 소리도 안들리는데.. 어떻게 될까봐.. 그때, 거기 와주셔서, 저한테 힘내라고.. 그래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제가, 평생을 못잊을거에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제가 너무 감사드려요.” 전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는지, 환자분은 많은 이야기를 수화로 전하셨고 수화 내용의 100%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마음은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다.
그날, 수술실에서 그 환자분에게 필요했던 건 수술의 과정과 방법, 그러한 치료의 내용을 전달해줄 유창한 수화가 아니라, 그 불안한 시간을 자신의 언어로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그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그 환자분과의 만남은 그분의 인생에서 잠깐의 스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사회복지사가 대상자의 삶에 항상 커다란 변화를 줄 수 는 없을 것이다. 물질적인 변화든, 삶의 방향의 변화든, 환경의 변화든... 하지만, 그러한 커다란 변화를 줄 수는 없더라도.. 따뜻함의 전해짐.. 삶을 살아가는 중에 한 번 쯤은 경험했으면 하는, 사람의 따뜻함은 전해드리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 환자분과의 만남의 경험을 통해..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또 다른 분 들을 만날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은 의료사회복지사는 아니지만, 사회복지사로서 힘들고 아픈 분들을 만나고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때, 여전히 지치고 무기력해지지만 그럼에도 간혹 만나는 이러한 따뜻한 경험은 사회복지사로서의 나를 뿌듯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