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느즈막히 시작되는 보통의 일요일과 달리 아침 일찍 눈을 떴습니다. 가면서 먹을 간단한 과일과 빵을 가방 안에 넣고 추위를 대비해 옷을 여러 겹 껴입습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출발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설렙니다. 센터로 나가는 특별한 일요일의 시작입니다.
출발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설렙니다. 센터로 나가는 특별한 일요일의 시작입니다.
제가 특별한 일요일을 보내는 그곳은 ‘기적’ 같은 곳입니다.
기적같이 인도, 몽골, 나이지리아, 가나, 베트남, 필리핀 등 세계 각국의 남녀노소가 매주 모이고, 기적같이 발 벗고 나서주는 분들이 늘 계시며, 기적같이 3시간이 30분처럼 흐르는 곳입니다.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매주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니 제겐 특별한 일요일이 될 수밖에요.
대학교 1학년, ‘사천원’으로 사회에 이로운 일을 실천하는, ‘원천사 프로젝트’를 통해 이곳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그곳을 인연으로 맺어주신 분은 파키스탄에서 오신 조셉아저씨입니다.
조셉아저씨가 센터와 연계된 다른 병원에서 X-ray 촬영을 할 수 있도록 모시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까지 동행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죠.
치열한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투박한 손, 그 중에서도 깁스를 하고 있는 새끼손가락, 남색의 얇은 점퍼와 세월이 묻어있는 청바지가 눈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외국인이니 분명 영어가 더 편할거야.’
“Hi, nice to meet you! What's your problem?(어디가 아파서 오신거에요?)"
“(미소) ㅈ, 저 한국말 잘해요.”
능숙한 한국어 발음이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외국인이니 당연히 한국어 못할 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한국에 오신지 햇수로만 10년이 된 조셉아저씨는 알고 보니 한국어 대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외국인은 당연히 한국어를 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거야.’는 정말 근거 없고 잘못된 지레짐작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죠.
조셉아저씨는 파키스탄에서 큰 꿈을 가지고 한국에 온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몸을 쓰는 막노동 일을 해왔었고, 반복적인 막노동으로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된 허리통증에도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 때문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요. 아파도 너무 아파서 아침에 3시간 걸려서 왔어요.
처음에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되는대로 참았거든요.
병원비 낼 돈이 없어서요. 어떻게 비싼 병원비를 낼 수 있겠어요.”
당장 아픈데 참는건 아니라고 다그치는 제게 아저씨는 돈을 계속 벌어야 해서 아프다는 이유로 일을 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고용된 곳의 한국인 사장님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만났던 사장님들에 비해서 인간적이고 좋으신 분이라고, 적어도 월급은 제때 주시는 분이라고, 함부로 일을 쉬었다가 이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셨죠. 그래도 이렇게 멀지만 좋은 분들이 무료로 도와주시는 곳이 있지 않느냐고, 그래서 정말 감사하다고, 이렇게 당신을 위해서 동행해준 것도 고맙다고 하시며 희미한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저는 그 때 알았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될지, 어떻게 해야 제가 스스로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그리고 사천원으로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유자차 두 잔을 사고 아저씨를 기다렸습니다.
다시 센터로 돌아가는 길, 한 손에 유자차를 들고 조셉아저씨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혜화문 담벼락을 따라 걸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돌보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저는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는 피부색, 종교, 국적, 성별의 제약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한테 생명과 건강은 그만큼 숭고하기 때문이죠. 사실 저는 오늘 이곳에 처음 왔는데 앞으로도 아프시면 언제든지 이곳으로 오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싶어요.”
그 날 조셉아저씨는 제게 첫 인연이 되어주셨습니다. 이후로도 지금까지 센터에서 뵙는 조셉아저씨는 제가 보통의 일요일과는 다른 특별한 일요일을 기다리게 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첫 날의 사천원은 조셉아저씨에게 쓰였지만 조셉아저씨로 하여금 저는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더 넓은 세상을 무대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존재가치를 발휘하며 사회의 이로운 일에 사용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봉사기관에서 시작된 제 특별한 일요일은 현재까지 진행 중입니다. 센터에서는 가끔씩 작은 음악회를 열어 치열한 삶 속에서 잊고 살았던 고향과 가족들에게 그리움의 인사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건강, 사랑, 평화 등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이 전 세계 어디서나 지켜질 수 있음을 확인하는 따뜻한 시간이에요.
조셉아저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공간과 사람의 존재에도 치유와 위로의 힘이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느낍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런 기적의 한 조각이 된다는 것도 정말 감사한 경험입니다.
그래서인지 보통의 일요일과는 다른 ‘특별한’ 일요일에, 저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