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센터

  • 내일을 위한 이별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903ㅣ글이지연님ㅣ그림정가희님]
지난 해 가을 어느 날 평소처럼 아동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민기(가명)가 쭈뼛쭈뼛 다가와서 말을 걸어 왔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잘 물어 보는 아이였지만, 그날은 표정이 좀 어두웠다. “선생님은 뭐하세요?” “일지 쓰고 있지!” “일지가 뭐예요?” “일지는 선생님들이 매일매일 일한 것과 너희들하고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는 거야.”
“그걸 매일 써야 해요?” “응, 매일 써야해. 그것도 선생님들 일중에 하나야. 그리고 일지는 너희들이 일기 쓰는 거랑 같은 거야. 일기를 쓰면 나중에 궁금한 게 있으면 펼쳐볼 수도 있고, 또 읽으면서 내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알 수 있게 되어 반성도 하게 되고 앞으로는 더 잘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지. 민기는 일기 쓰니?” “네. 아빠가 매일 쓰라고 해서 ……” 민기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민기의 얼굴에서 나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생각이 들었다.
민기는 거의 매일 센터에서 저녁밥을 먹고 집에 갔다가 다시 센터로 돌아오는 아이였다. 친구들이 있으면 놀기도 하고 친구들이 없으면 선생님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면서 센터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민기가 “나랑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가, 붙임성도 있네.”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별일이 없어도 민기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물건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친구들이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치 집에 가는 것이 싫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센터에 있다가 선생님들이 퇴근시간이 되거나 아니면 아빠한테 집에 오라는 전화를 받고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급식시간 이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 민기의 손목에 멍 자국이 보였다. 저녁을 먹고 민기를 따로 불러서 물었다. “민기야, 너 아까 보니까 손목에 멍이 들어 있던데 왜 그런 거야?” “아, 이거요?” 민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제, 집에 있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바람에 열려서 부딪혔어요!” “그래?”
민기의 말을 듣고 머리와 얼굴, 목, 팔 등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머리위에 정수리부분이 많이 부어있었다. “민기야, 머리는 왜 그래?” “머리도 부딪혔어요.” “머리도 부딪히고, 손목도 부딪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부딪혔다는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머리는 막대기 같은 것으로 맞은 것처럼 많이 부풀어 있었고, 아이의 손목에 있는 멍은 맞지 않기 위해서 팔로 막다가 생긴 멍처럼 보였다. 민기가 뭔가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물을 수도 없어서 다음날 다시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기로 하고 아이를 집으로 보냈다.
다음날이 되었다. 민기의 얼굴은 코 옆과 눈 주위까지 멍이 들어 있었다. 눈이나 코를 부딪쳐서 생긴 멍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민기 혼자 남아 있을 때 다시 민기를 불러서 이야기를 했다. “민기야, 아무래도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가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우리가 너를 도와줄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이야기해줄 수 있니?” “……”
민기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아빠한테 맞았어요...” “……” 잠깐 동안 민기 앞에 있었던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 한 후 민기는 두려워하는 것 같아보였다. 아빠랑 통화를 하면서 민기가 “아빠!, 냉장고에 있는 초록색병에 있는 거 먹지마세요!”라고 했던 말과 월요일에 멍이 들은 걸 발견했는데 지난주 금요일에 아이가 센터에 나오지 않은 일, 센터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갔다가 다시 와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집에 가지 않으려고 했던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제야 민기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민기가 아빠한테 맞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한테 또 맞을까봐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전에도 학교선생님에게 아빠의 폭력을 이야기했고, 아동학대로 신고가 된적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때 민기아빠는 경찰서에서 같이 조사를 받고, 시정명령으로 몇 주간 아동학대예방교육을 받았다. 그때 민기아빠는 민기에게 “너 때문에 교육받느라 일도 못하고 너무 힘들다.”, “함부로 이야기하면 혼난다.” 등의 협박을 했었고, 학대는 계속되었다고 했다. 민기의 머리를 변기에 처박게 하는 등 폭력도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민기부모님은 이혼하여 민기는 민기랑 둘이 살고 있었다. 엄마는 외국국적이었는데, 아빠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이혼을 요구했고, 민기아빠는 그러는 민기엄마에게 친권을 포기해야만 이혼을 해주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아이를 두고 혼자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 뒤로 민기는 엄마와 떨어져 아빠와 둘이서만 살게 되었고, 복지관의 사회복지사가 집을 방문했을 때 아이가 낮에 혼자 집에서 지내는 것을 보고는 지역아동센터로 연계시켜 여기에 다니게 된 것이다.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준 민기에게 “선생님이 알았으니까 도와줄께.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집에 가서 선생님한테 얘기했다는 말은 아빠한테 하지 말고. 알았지?”라고 다독인 후 집으로 보냈고 선생님들은 모두 모여 회의를 했다. 아이가 아빠의 폭력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복지관 사례관리팀장님과 학교사회복지사, 교감선생님, 담임선생님, 아동센터장님과 담임선생님이 모여 회의를 하고 대책을 세웠다. 우선 민기를 아빠의 폭력으로 보호하기 위해 아빠와 격리하고, 민기아빠는 아동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조치했다.
다음날 민기가 센터에 왔을 때, 우리는 민기와의 마지막 시간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좋아하는 과자를 챙겨주고, 마음속으로 아이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짧은 눈인사를 했다. “엄마, 아빠와 떨어진 곳으로 가도 잘 지내렴.” “좀 더 일찍 알지 못하고 너를 힘든 상황에 있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집으로 왔으면 좋겠어.”
선생님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아이가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민기를 아동학대보호기관에 보내고, 민기아빠를 경찰서에 신고했다. 민기아빠는 아이와 떨어지고 난 후, 센터에 전화를 걸어와 민기를 데려가지 말라며 어디로 갔는지 말하라고 협박을 해왔다. 민기아빠의 폭력적인 행동 때문에 나와 선생님들은 불안에 떨기도 했었다. 민기는 아빠의 처벌을 원한다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또 한 번 마음이 아파왔다. 민기는 다른 도시의 아동보호기관으로 보내졌지만, 규정상 어디로 보내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동센터에서 종결처리가 되자 더 이상 민기아빠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를 몰래 보러간 민기엄마는 아파트 경비실을 통해 아이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민기엄마는 아이와 같이 살면서 밥이라도 챙겨주고 싶다고 했지만, 민기는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 아빠의 폭력 속에서 엄마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민기는 임시보호시설에서 3개월이 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지금도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아동센터의 중요한 역할은 아이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만일 민기가 아동센터에 오지 못하고 예전처럼 집에서만 지냈다면 여전히 아빠의 폭력과 불안한 환경 속에서 고통 받고 상처 받으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정들었던 민기와 헤어져 안타깝지만, 민기는 좀 더 행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만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이 일을 계기로 새로운 길을 만났다. 아동 복지를 비롯한 전문적인 사회 복지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회 복지에 대한 전문 지식과 체계적인 실무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민기와 같은 아이들을 온전히 돌보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식과 실무 능력을 가진 사회복지사로서 일을 하게 된다면, 더 빨리 아이들이 처한 개개인의 상황을 파악하고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동복지를 담당하는 예비 사회복지사로서 더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살피고 도와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본다. 그리고 민기에게 가장 좋은 곳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이 있는 가정임을 잘 알기에, 민기가 폭력 없는 가정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