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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의 봄
  • ['투병 및 간병' 감동 수기 | 202007ㅣ글 양지영님ㅣ그림 박연수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엄마가 인공 관절 수술 후 처음 나서는 길이다. 비가 온 뒤라 땅은 젖었지만 숲에서 품어 나오는 향은 더 진하게 느껴진다. 계곡에 물이 불어 거침없이 흘러내린다. 콸콸 떠내려가는 물을 바라보니 그동안 졸였던 마음이 씻긴 듯 내려간다. 엄마가 퇴원했을 때 남편은 흰 운동화를 선물했다. 엄마는 사위가 사준 운동화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 운동화를 신고 돌이 지난 아이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엄마의 걸음걸이가 예전보다 많이 편안해 보인다. 활처럼 휘어버린 다리로 어기적 걷던 엄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리가 아파 늘 쉬어가던 벤치도 이젠 아쉽지가 않다. 엄마는 이제 100세도 거뜬하게 사실 것 같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려본다. 비가 오는 새벽 무렵이었다. 아직 여명이 채 열리지 않는 어둑한 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엄마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방문이었다. 엄마의 손엔 큰 가방이 손에 들려있었다. 비에 옷이 젖어 여름인데도 추워 보였다. 다리에 통증이 더 심해졌는지 한 다리는 힘을 쓰지 못했다.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휘어져 이 다리로 혼자서 어떻게 왔나 싶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 살러 오신듯했다.
사업하던 동생이 부도가 나면서 이제는 그곳에 계실 수가 없었다. 빚쟁이에 쫓기는 동생은 휴대전화기도 꺼둔 상태였다. 엄마는 빚쟁이가 들이닥쳤던 그 날을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하고 자리를 살펴드렸다. 다음날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엄마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의 몸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조그만 한기에도 기침이 터져 나왔다. 천식이 원인이었다. 주무실 때조차도 편안하게 주무시질 못했다. 숨결이 가빠서 옆에서 보기에도 힘들었다.
엄마는 식당에서 오래 일했다. 아버지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늘 술에 취해 살았고, 인생의 실패자로 늘 자신을 자책하던 사람이었다. 150센티가 겨우 넘는 엄마는 식당에서 무거운 솥을 내렸다 올렸다 하다 보니 팔이며 다리며 관절마다 성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는 다리에 남아있는 연골이 거의 없었다. 걸을 때마다 뼈끼리 부딪쳤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사실 다리 수술은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 수술이다. 혼자 부담하기엔 돈도 돈이지만 엄마가 그 큰 수술을 감당할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이지 않은가. 다리 통증이라도 빨리 없애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병원에서 종합검사를 했다. 다행히 천식이 있긴 하지만 폐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엄마를 주민센터에 전입신고 하러 갔다가 주거복지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결국, 엄마는 수혜자로 결정이 나서 인공 관절 수술에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수술 날짜는 바로 정해졌다.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수술이라 간병인까지 구할 돈이 없었다. 수술할 동안 내가 자처해서 나섰다. 그동안 엄마에게 해 드린 데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수술하고 나오는 날 엄마의 다리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수술한 뒤 정신이 없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횡설수설하셨다. “누가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데 나는 안 간다고 했다. 말은 안 하는데 저승사자지 싶다. 저승사자면 검은 옷을 입고 그럴 건데 겉은 멀쩡하더라.” 엄마는 한동안 침대에 누워서 이상한 말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정신이 돌아오면 다리 수술의 경과에 대해 말해주었다.
휠체어에 태워서 화장실 가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대변이 속옷에 묻기도 하고, 오줌을 지리는 일이 많아졌다.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음식을 거부하고 먹지 않으려고 해서 그것도 너무 안타까웠다. 전복죽을 쑤어서 오기도 하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 위주로 힘을 쏟았다. 특히 밤에 화장실에 가는 일이 제일 문제였다. 엄마를 일으키는데 많은 체력이 소모되었다.
그래도 물리치료실에는 매일 가서 걷기 연습을 시켰다. 몸이 제대로 작동되어야만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마치 돌이 지난 아이 같았다. 평생을 걷고 살았는데 한 걸음을 옮기는 일이 이렇게 힘든지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도 나를 키울 때 그러했으리라. 돌 지난 내가 휘청거리며 걷는 것을 보고 나처럼 기뻐했을 것이다.
한 걸음씩 늘어갈 때마다 얼마나 좋았을지, 손뼉을 쳐 주고 응원해주고 그렇게 걸을 수 있도록 엄마는 나를 보살펴주었으리라.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이렇게라도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예쁘게 잘 키워준 점, 어려운 형편임에도 끝까지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점. 결혼까지 힘을 보태준 엄마를 생각하니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팅팅 부은 다리가 가라앉을 즈음 또 다리 하나를 수술하게 되었다. 이젠 두 다리가 붕대에 감겨 아예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엄마를 팔로 감싸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일은 힘든 육체노동이었다. 엄마를 부축할 때면 온몸에 땀이 흘렀다. 행여 수술한 자리가 다칠까 봐 아기 다루듯이 다루어야 했다. 일 년 같았던 한 달이 지나자 나도 엄마도 병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그렇게 암담한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엄마가 두 다리로 걷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서툰 걸음걸이로 한 발씩 걷는 운동이 계속되었다. 엄마를 격려하며 빨리 완쾌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엄마도 나도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온전하게 땅을 딛고 걸을 수 있었던 건 물리치료를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드디어 병원에서 퇴원했다. 여러 가지 약을 처방받고 집에 와서는 또 어려운 병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 19가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는 즈음이어서 엄마를 함부로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소독하고 연고 바르고 매일 걷는 일이 중요했다. 다음날 엄마와 아파트 화단에 나란히 앉았다. 얼마 만에 보는 햇빛인지 몰랐다. 햇빛을 받으니 눅눅했던 마음도 보송보송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아파트 주변으로 추운 날씨를 뚫고 나온 벚꽃이 눈에 띄었다.
벚꽃은 봉우리를 틔우기 위해 추위와 바람에 맞서 싸웠다. 고난을 뚫고 나온 벚꽃은 꽃잎을 열어 눈부셨다. 시련을 겪고 나온 벚꽃도, 엄마도 봄은 이제부터가 아닐까 생각 들었다. 엄마가 수술 후 다시 걷는 일은 여러 가지로 내게 생각거리를 주었다. 수술한 지 4개월이 지났다. 엄마는 아직 서툴게 걷고 있지만 조금씩 다리에 힘이 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제 통증은 사라졌고 엄마의 표정은 봄 햇살처럼 환했다. 활처럼 휘어진 다리가 일자형으로 곧은 다리가 되는 것도 신기했다. 다리가 펴지자 엄마의 몸도 바르게 펴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런 다리가 신기한지 자꾸만 쓰다듬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엄마를 돌보기는 지금도 쉽지 않다.
그동안 다리가 아파 다니지 못했던 여행도 다니고, 이제 날개를 달고 훨훨 다녔으면 좋겠다. 나는 엄마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었다. 이 질문은 다리가 안 아프면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서 묻는 일이기도 했다. 맨 먼저 제주도를 가고 싶다고 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제주도가 너무 멋있다는 거였다. 수영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시니어 합창단에 가서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도와줄 생각이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자신은 돌보지 않았던 인생을 보상받았으면 좋겠다. 이제 엄마의 봄이 시작되려고 한다. 오늘 걷는 이 산책길을 엄마랑 끝까지 걸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오늘은 엄마에게 오래전 못했던 말을 해야겠다. “엄마의 남은 인생 멋지게 사세요. 엄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