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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을 투사로 만든 아이
  • ['투병 및 간병' 감동 수기 | 202007ㅣ글 김종숙님ㅣ그림 박연수님]
“이ㅇㅇ! 우리 돼지! 넌 어쩜 이렇게 귀여워?” “아이구~ 우리 아들, 응아도 잘했네. 잘해라!” 우리집에서 흔히 듣는 칭찬 소리다. 스무 살이 되도록 여전히 ‘아기’소리를 듣는 ㅇㅇ이가 이젠 체중도 나보다 더 많이 나가서 혼자서는 안기에 버거운 청년이 되어버렸다. ㅇㅇ이는 내가 세 번째 낳은 아이다. 첫 아이는 병명만 겨우 남기고 우리 곁에 온 지 열흘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고, ㅇㅇ이를 낳고서야 첫 아이의 병명이 오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아이는 개인 산부인과에서 낳아서 일주일을 함께 생활했는데,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져서 큰 병원으로 옮긴 지 사흘 만에 떠났기에 제대로 된 검사를 할 수가 없어서 소변검사 결과를 통해 모계유전인 ‘Ornithine transcarbamylase’로 진단받아서 내 탓으로 아이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떠나보낸 것 같아서 몇 년간을 마음 아파했었다.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함께 해야 하는 고통이 뼈아프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ㅇㅇ이를 낳고 일주일만에 똑같은 증세(암모니아 수치가 많이 올라가서 호흡을 못해 뇌손상을 입는)가 나타났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아이를 이번에는 도저히 황망하게 떠나보낼 수 없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ㅇㅇ이는 서울 대형병원으로 전원조치 된 지 3일 만에 복막투석을 하여 회생이 되었다.
하지만 뇌손상이 너무 심해서 후유장애가 심했고, 태어나자마자 태변을 먹은 탓에 시작된 입원은 두 달여간 계속 되었다. ㅇㅇ이의 질환은 선천성대사이상 중에서 몸에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어서 음식물을 먹었을 때 단백질을 분해하지 못해서 생긴 암모니아를 배출할 수가 없다. 독성이 강한 암모니아성분은 뇌손상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성분이다. 뇌손상 때문에 볼이 너무 딱딱하게 굳고, 뇌는 손상되어 머리는 작고 얼굴은 상대적으로 큰 상태여서 우윳병을 빨지 못하는 상태가 무척 오래 갔다. 볼을 힘주어 마사지를 해주니 몇 달은 우윳병을 빨아서 환호하고 난리였지만, 그렇게 먹어도 최소한 생존에 필요한 정도의 단백질 밖에는 먹지 못해서 체내에 있는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암모니아 수치가 또다시 올라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암모니아수치가 해결이 되면 뇌손상의 후유증인 경련이 발목을 잡아서 병원과 집을 반복해서 계속 오가는 생활이 5년이나 지속 되었다
그렇게 OO이와 병원을 내 집처럼 익숙하게 지내는 동안 나의 30대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오랜 병원생활을 하며 유치원이며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이유 모를 열병과 뇌수막염 등으로 뇌손상을 입어 의식도 없이 누워있고, 엄마들은 그 옆에서 잠도 안 자고 식사도 안한 채 엉클한 모습으로 아이가 깨어나기만 바라며 간호하는 모습을 수차례 지켜보았다.
나 역시도 그 과정을 견뎠는데, OO이가 백일 무렵, 함께 병실을 쓰던 한 엄마가 우유 한 방울이라도 더 먹여서 콧줄을 꽂지 않으려고 잠도 못 자고 기를 쓰던 내 모습을 보고 아침마다 본인과 아이가 식사하는 자리로 나를 억지로 불러 앉히고는 밥을 나눠 주었던 기억이 났다. 정말 희망도 없고, 체력도 방전되어 몸살이 나기를 반복하던 내게 그 엄마의 그 배려는 그 누구의 따뜻한 말이나 위로보다도 더 큰 힘이 되었다.
그 배려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엄마의 아이는 눈이 정말 예쁜 여자 아이였는데, 간이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사망자의 간이식을 기다리다보니 순번이 돌아오지 않아 늘 황달 때문에 노랗게 분이 나는 것 같은 몸과 눈, 복수로 가득 찬 커다란 배를 안고 힘겹게 생활하다가 유치원도 제대로 못 가보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또래 아이들이나 가족들과 즐거운 놀이나 가족여행도 한 번 제대로 못 가고 수년 째 병원생활을 하는 아이들과 보호자들을 보면서 ㅇㅇ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하게 잘 자라던 아이들이 뇌손상으로 중도장애인으로 살게 되자 넋을 놓고 우울감에 시달리는 보호자들도 있었고, 병원생활이 몇 년 째 이어지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소원해진 부부관계로 원치 않던 이혼가정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첫 아이를 잃은 경험 때문에 우리 가족은 OO이의 뇌손상과 투병생활로 인해 오히려 더 단단히 서로를 보듬고 위로해주며 살았다. 뇌손상 때문에 삼키는 능력이 현저히 낮은 ㅇㅇ이를 뉘어놓고 주사기로 분유를 짜서 흘려주면 반은 받아먹고, 반은 사래가 걸려서 흡입성 폐렴이 걸리는 경험을 하게 되어 결국 ㅇㅇ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고 피하고 싶어 하던 위루관 시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수없이 입원과 검사로 성한 혈관이 없는 ㅇㅇ이의 배에 관을 꼽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게 먹고 분수처럼 분유를 토하며 힘들어하고, 잘 먹지 못해 감기와 경기를 일 년 내내 하며 고생하는 ㅇㅇ이의 고통을 하나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 결단은 ㅇㅇ이를 낳고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ㅇㅇ이는 위루관으로 영양 공급이 원활해지자 체력도 좋아지고 잘 자라면서 병원 출입이 많이 줄어들었다.
일 년에도 수차례 병원을 오가며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치르며 우리 가족들은 어느새 투사가 되어 있었다. ㅇㅇ이가 먹는 특수 분유를 제조하는 분유제조사에 대한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일반분유의 4배 가량의 금액에 분유를 구입해야 하는 어려움이 직면했다. 병원비만으로도 경제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평생 먹여야 하는 분유 구입은 산 너머 산이었다. 결국 신문사와 방송사에 제보를 하고, 방송출연도 하고,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넣는 작업을 수차례해도 ‘예산이 부족해서 지원 불가’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청와대 신문고에 다시 한 번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는데, 나의 두드림이 헛되지 않았는지 우리 지역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다. 도대체 분유가 얼마나 비싸길래 지원을 요청하느냐고 하던 보건소 담당자가 집에 와서 일반분유의 반 정도의 분량인데 가격은 네 배나 비싼 분유를 확인하고는 전국 최초로 특수 분유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것이 우리 투쟁의 시작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우는 아이를 절대로 누구든 먼저 다가와서 달래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ㅇㅇ이가 다니는 대형병원 의학유전학센터에 의뢰하여 ㅇㅇ이와 같은 질환 부모들의 모임을 부탁하였다. 그게 2004년이었다. 그 모임이 시발점이 되어서 우리 부부는 2005년 ‘한국선천성대사질환협회’ 창립을 하고, 현재까지 선천성대사질환 환아와 가족들을 위한 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10여 가정으로 시작된 작은 가족모임은 이제 200여 가정의 환아와 가족들이 함께 하는 협회가 되었고, 특수분유, 저단백 햇반, 다양한 약품 수입과 의료보험수가 조정, 가족들을 위한 세미나, 가족캠프, 상담 등 다양한 사업으로 많은 환아와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 소통하고 위로하는 사단법인으로 성장했다.
나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면 외롭고 힘들어서 다 내려놓고 좌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ㅇㅇ이가 우리 가족을 성장시키고, 우리와 같은 환경의 가족들을 돌아보고 함께 더불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무살이 된 ㅇㅇ이가 여전히 아기 같은 발달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 가족은 ㅇㅇ이의 희귀질환과 중증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 하루도 주저하지 않고 한 발을 내디딜 것이다. ㅇㅇ이를 사랑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