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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핑크리본
  • ['투병 및 간병' 감동 수기 | 202007ㅣ글 윤옥순님ㅣ그림 박재환님]
잠실대교 너머 서울의 밤은 너무도 휘황찬란했다. 병실에 누운 시골아줌마의 정신 줄을 전부 빼앗아 가버렸다. 밤새 반짝이는 불빛들은 밤하늘의 별들도 잠재웠다. 날이 새면 큰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병실에서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긴 채 그렇게 감상에 빠져 잠들 줄을 몰랐다. 하루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품에 안은 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너무도 평온하게만 느껴졌다.
몇 달 전 보험공단에서 2년마다 한 번씩 시행하는 건강검진을 받았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장애인 활동 보조인 일을 하던 중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받았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급하게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닥쳐온 시련을 감지하지 못했다. 지금은 일을 하고 있으니 내일 시간 내서 들리겠다고 하고 끊었다. 무슨 일일까? 궁금증에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며 하룻밤을 지내고 병원에 갔다. 산부인과 선생님의 굳은 얼굴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컴퓨터 화면을 가리키며 하시는 말씀이 가슴에 ‘암’인 것 같은 물체가 있으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셨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치 엉킨 실타래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왜!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찾아왔지 하는 충격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다음날 큰 병원에 갔다. 가지고 간 엑스레이 사진을 보시더니 전문 의사 선생님은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며 혈압 약을 복용 중이니 약을 조절해서 먹고, 일주일 뒤에 검사를 하자고 했다. 기다리는 일주일은 일 년보다도 길어서 피가 말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야속하게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적중했다. 유방암 2기! 수술 날짜가 잡히고 두 달을 기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수술이 잘되어서 일상의 생활을 다시 하게 도아 달라는 기도뿐이었다.
뒤척이다 새벽이 되어 의사 선생님을 맞이했다. 환한 미소로 반기시더니 유명한 화가처럼 봉긋한 내 가슴에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다음에는 그 선을 따라 메스로 그림을 그리실 테지. 마음이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난 내 가슴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수술대에 오르고 부모님을 떠올리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아픈 손가락으로 살아온 자식이었다. 뇌성마비로 태어나 돌덩이가 되어 부모님의 가슴에 박힌 자식이었다. 비록 경증이긴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나를 어떻게 하든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 항상 동분서주하셨다. 용하다고 소문난 의원은 다 찾아다녔지만, 끝내 박힌 돌 빼내지 못하고 다시는 오지 못할 먼 곳으로 가버리셨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행이다 싶다. 살아 계셨으면 돌덩이 하나를 더 얹어 드릴 뻔했으니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지 통증이 온몸을 짓눌렀다. “정신이 드세요?”
간호사가 깨우는 소리가 비몽사몽으로 귓전에 맴돌았다. 얼마 후 병실로 올라오니 가족들이 고생했다며 반겨주었다. 아! 이제 살았나보다 하는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앞을 가려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은 채 목에 걸린 가시를 삼키기라도 하듯 꿀꺽꿀꺽 설움을 삼켰다.
그렇게 내 몸 일부를 떠나보내고 가슴에 ‘핑크리본’을 달았다. ‘핑크리본’이라는 단어는 전 세계 유방암 환자에게만 붙여진 이름이다. 유방암 예방을 위한 캠페인이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열리고 있다. 핑크리본을 달고 나니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게 됐다. 그동안 힘들게 살아온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가슴에 한으로 남아 ‘암’이라는 불순물을 키우고 있었나 보다.
수술과정은 그래도 견딜만 했다. 같은 날 수술 받은 환우들과 수시로 한강 변을 산책하곤 하였다. 그런데 일주일 후 퇴원해서 집에 온 후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겨 열이 불덩이 같이 올랐다. 하필이면 추석 때라 남편과 아들은 큰집으로 가고 혼자 있을 때였다. 다시 또 입원해서 염증과의 싸움을 열흘 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후 시작된 항암치료! 수술은 잠 한숨 잔 것으로 끝났지만, 항암 치료와의 싸움은 잘 수조차 없는 아주 잔혹한 형벌이었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으로 나오지 않으면, 수치가 정상으로 올리기 위해 맞는 주사를 맞았다. 그 과정마다 온몸의 뼈마디가 너무도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섯 번의 항암 주사와 암세포만 공격해서 죽이는 열 번의 표적 주사를 맞고 나니, 겨우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온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갔다.
퇴원은 했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대문 밖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운동을 해야 한다기에 한 발 한 발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운동을 해서 다리에 힘을 길러나갔다. 늘 옆에서 고통을 함께하고 병간호를 해준 아들이 있어 병과의 사투를 이겨 낼 수 있었다. 직장에서 휴가를 내어 엄마를 지켜준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이번 기회에 고맙고,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치료 과정에서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할 땐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엄마! 아버지! 왜 나는 다른 형제처럼 순탄하게 살지 못하고, 가시밭길 인생을 살아가는지요.’ 혼자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수십 번 외치고 또 외쳤다. 이제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말처럼 세월 따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있다. 기쁨도 슬픔도 그 끔찍하던 아픔도…. 이제는 그 험한 가시밭길 늪에서 빠져나왔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어떤 모습이 되든지 이겨 나갈 자신마저 생겼다. 수술한 지 오 년이 넘었다. 새로운 세상과 더불어 살고 있다. 장애인협회에 나가서 복지 일자리 일도 다시 하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역량 강화에 힘쓰고 있다.
시니어로빅에 나가 열심히 운동하며, 내 몸에 잠재하고 있던 끼를 발산하고, 가끔 등산도 하면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 있다. ‘수필아 놀자’ 동아리 모임에서는 글쓰기도 배우고, 작품을 읽고 평가도 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리고 황혼에 기우는 나이지만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해서 벌써 3학년이 되었다. 장학금도 받으면서 하는 학교생활이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한다.
지난해부터는 지체장애인협회에서 목요일마다 무료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제공해 주셔서 일반 목욕탕에서 느꼈던 수치감 없이 목욕을 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활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모두 중지되어 집에서만 생활하니 속상하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이렇게 사소한 일에 희로애락을 느끼며 평범한 일상의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더 절실하게 느낀다. 이제 어제는 추억으로 남기고, 오늘은 행복으로 채우고, 내일은 멋진 선물로 맞이하려한다. 남은 인생 밝은 햇살처럼 웃고 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