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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타워
  • ['투병 및 간병' 감동 수기 | 202007ㅣ글 심종현님ㅣ그림 서유진님]
2020년 코로나 사태가 그러했듯이 늘 당연하게 주어졌던 평범한 일상은, 그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어머니의 암 판정을 처음으로 들은 날도 그랬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남편과 아들이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더러워진 옷을 빨아 정갈하게 준비해두고, 직장과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투정을 들으며 위로해 주시던 어머니. 그렇게 가족의 버팀목으로서 당연한 듯 그 자리에 있어 주셨던 어머니가 암이라는 이야기를 수화기 너머로 들었을 때, 나는 혀가 없어진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창 내가 잘 살게 되는 것이 부모님도 기뻐할 일이라며 오직 나의 성공만 보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던 29살에 생긴 일이었다.
어머니의 검진 결과는 유방암 2기였다. 처음에는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의사가 잘못 판단한 걸 거야, 우리 어머니가 그럴 리 없어.’라는 불신은 ‘왜 이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 생긴 거야?’라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결과를 믿지 않고 세상을 원망한들 어머니의 암 진단은 사실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곁에서 돕는 일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서울에 있는 OO 병원을 방문하였고, 수술 일정을 잡게 되었다. 수술일을 기다리는 동안 특별히 드러나는 질환은 없었으나 어머니는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입가의 웃음도 사라졌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암이라는 초조함에 주변의 지인, 인터넷 가리지 않고 병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중 긍정적인 정보들을 어머니와 공유하며 어머니가 조금이나마 안심하길 희망했다. 당사자가 아닌 나도 이토록 초조하고 걱정인데 당사자인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 다만 나의 걱정과 응원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다가온 수술 전날, 다시 찾아온 서울에서 어머니는 입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을 배정받았다. 다인실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게 된 1인 병실, 커다란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과 무심한 듯 흐르는 한강의 모습은 일류 호텔의 경관 못지않았지만, 어머니가 아픈 와중에야 이런 아름다움을 함께한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이런저런 사전 검사를 마친 어머니는 환자복을 입으셨다. 고운 청춘에 나를 낳아 지극정성으로 길러주신 아름다운 우리 어머니는 이제 그 누가 와서 보더라도 환자가 되었다. 내일 아침 수술을 앞둔 어머니가 컴컴함 속에 빛나는 창밖의 서울 야경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신다. “나도 저기 남산타워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린다. 행여 들킬까 재빨리 자리를 피한다. 나는 가보았던 남산타워. 서울의 명소인 그곳을 즐겁게 관람하는 동안 나는 나의 즐거움에만 취해있었지 부끄럽게도 부모님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나를 위해 그토록 고생하신 어머니인데 나는 뭐가 어렵다고 이제껏 남산타워조차 모시고 가지 못했을까. 왜 어머니가 더 건강하고 더 젊었을 때 옆에서 투정만 부리고 어머니가 어디를 가고 싶으신지,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물어보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내 행복만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우리 가족의 행복일 거라는 내 생각은 그저 오만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건 함께 있음이 너무 당연한 우리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함께 행복할 방법을 찾는 일이란 걸 나는 어머니의 한 마디로 깨달았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수술 후 회복해나가는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독한 항암치료에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빠져나갔고 짜증이 잦아지는 등 어머니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셨으며 그 과정을 옆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더없는 고통이었다. 자주 열이 올라 응급실에 갈 때 한없이 위태로워 보이던 모습, 시장에서 산 가발을 써보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모습,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냐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 등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여러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고통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눈물을 지으실지언정 고된 치료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견뎌내셨다. 그래서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어머니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셨다. 어머니가 외출과 산책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하셨을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병실에서 바라보던 남산타워에 데이트를 하러 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며 점점 작아지는 서울의 풍경을 보았고 광장에서의 전통 무예 공연도 어머니와 함께 관람했다. 전망대에서의 멋진 경관을 동서남북 놓치지 않고 천천히 두 눈에 담으시는 어머니의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가족 뒷바라지만 하시느라 정작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은 못 가고 먹고 싶은 음식은 못 드셨던 어머니. 조금만 시간을 냈다면 더 일찍 그런 감사함에 조금이나마 보답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지금의 소중함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진 속 남산타워는 맑은 하늘 아래 선명했고, 우리 어머니의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이셨다.
올해 8월이면 어머니가 수술하신 지 어느덧 7년이 된다. 어머니는 많이 변하셨다. 끼니마다 열 알 남짓 드시던 알약의 개수가 한두 알로 줄어들었다. 외모도, 체력도, 마음도 병이 생기기 전처럼 건강해지셨다. 또한, 도전을 즐기신다. 문예 교실, 에어로빅, 서예, 가죽공예 등 다양한 강좌를 사람들과 함께하고 훌륭한 결과물을 산출하신다.
무엇보다도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여 환갑이 넘는 나이에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 현재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시다. 또한, 차가운 음식, 즉석식품 등을 멀리하고 운동하며 건강 유지를 위해 다분히 노력하고 계신다. 나는 힘든 시간을 극복해내신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한때는 행여 암으로 어머니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싫은 걱정을 했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당하게 암을 극복하셨고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정말 감사하다. 내가 세상 빛을 본 순간부터 심지어 본인이 가장 아프셨을 때도 나를 걱정해주시던 우리 어머니. 지금처럼 건강하고 오래오래 내 곁에 계셔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현재 교직에 있는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너희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부모님이 하고 싶은 일, 부모님의 꿈, 부모님의 건강을 여쭈어보라고.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아직 어린 내 제자들은 나의 말이 크게 와 닿는 것 같지 않다. 사춘기라 한창 부모님과 크고 작은 마찰을 겪을 나이이기에 별로 공감되지 않을 마음이 이해된다. 하지만 나의 말로 조금이나마 깨달음을 얻고 훗날 내가 어머니 병실에서 했던 것 같은 후회를 내 제자들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족이야말로 우리의 지지대이고 행복의 근간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