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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몸으로 서로를 사랑한 우리 가족 이야기
  • ['투병 및 간병' 감동 수기 | 202007ㅣ글 이지혜님ㅣ그림 서유진님]
우리 집에는 아빠방이 있어요. 그 방엔 큰 아빠사진이 있어요. 우리가 어린이집 소풍을 다녀오던 날 아빠는 병원이 아니라 꽃 속에 사진으로 우리를 만나주셨어요. 그 꽃 속에 웃고 있던 아빠 사진이 지금은 우리 집 방에 아빠가 늘 누워계시던 곳에 있어서 우리는 그 사진 앞에 매일 맛있는 것, 우리가 그린 그림, 사진, 예쁜 꽃들을 올려두어요.
제가 지금부터 우리는 땅에 아빠는 하늘에 살게 된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우리 집은 엄마, 아빠, 저 그리고 오빠 이렇게 넷이 살았어요. 우리 집 가족은 꼭 4명이 다였어요. 그래서 아빠는 세상에 딱 넷뿐인 우리 가족을 지키려고 정말 애를 많이 쓰셨어요. 그런데 너무너무 아빠가 일을 많이 했나 봐요. 어느 날 아빠가 피를 흘렸고, 배가 부풀어 올라서 병원에 갔는데 아빠가 희귀한 암에 걸렸다고 해요. 그때 제가 3살, 오빠가 5살 이였어요. 아빠는 병원에 가자마자 수술을 할 수 없는 4기로 진단을 받았고, 엄마는 딱 넷뿐인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아빠의 간병에 모든 것을 걸고 매달렸어요. 아빠는 진단을 받고 거의 10리터 가까운 복수를 뽑아내셨는데, 우리 아빠가 걸린 암은 희귀암이라 맞는약이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빠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항암을 시작했고, 저는 아빠를 지키고 싶어서 아빠가 항암치료 할 때 따라가고 싶었어요. 근데 너무 어린 제가 가기는 힘들다고 엄마가 저를 어린이집에 두고 가서 저는 어린이집 문 앞에서 1시간 가까이 앉아서 울었어요. 아무도 저를 못 말렸지요. 저는 아빠를 지켜주러 가야하는데 함께 갈 수 없어서 너무너무 속상했어요.
우리 아빠는 요막관암을 앓으셨는데, 발견되었을 때 12cm나 되셨대요. 더 큰 문제는 그 암세포가 뱃속에 씨앗 뿌리듯이 퍼져버렸대요. 그게 배 안에서 자라면 장기를 눌러서 아빠가 너무 힘들어진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빠와 저는 하나님께 “우리 아빠 면역 세포가 힘이 세져서 암 세포를 다 ~~ 잡아먹게 해 주세요” 하고 매일 밤 기도했어요.
아빠는 항암 부작용으로 몸이 쇠약했을 때도 우리와 함께 보내주시려고 우리를 끌어안고 같이 만화도 보고 공원에도 가주셨어요. 얼굴이 하얗고 지쳐서 힘들어 보였지만 나는 아빠와 함께 있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행복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했어요.
우리 엄마는 아빠를 낫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셨어요. 식이요법부터 면역요법까지 열심히 아빠 병에 대해 공부하면서 밤낮없이 간병에 매달렸어요. 엄마는 아빠를 하루에 7시간씩 주물러 가면서, 하루 2리터 정도의 녹즙을 내리고 음식을 만들고, 아빠를 살피고 아빠를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공부했어요. 그래서 저는 아빠가 좋아지고 있는 줄만 알았어요. 엄마도 아빠도 우리에게만은 늘 항상 웃는 얼굴이셨거든요.
아빠가 아프고 얼마 후, 제가 재롱잔치했던 때에는 아빠가 직접 와서 꽃도 주고 사진도 찍어주셨는데 그다음 해에는 아빠가 앉아계시지를 못하셔서 도중에 그냥 가셨고, 멀리서 아빠가 간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엄마가 보였어요. 아빠가 몸이 많이 힘들어지셨던 거에요.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울고 있는 엄마의 눈빛 속에서 저는 심상치 않음이 느껴져서 그때 심한 폐렴에 걸렸어요.
그 이후 아빠는 점점 살이 빠져가고,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점점 쇠약해 가는 게 보였어요. 그리고 아빠가 엄마에게 부탁을 했대요. 마지막으로 바다와 산이 좋은 곳에 가고 싶다고요. 그리고 엄마는 거동이 불편한 아빠와 7살 된 오빠와 5살 된 저를 데리고 급하게 짐을 꾸려 300킬로 넘게 떨어진 시골로 이사를 왔어요.
그리고... 아빠는 계속 누워만 계셨고 엄마는 폐에 물이 차 호흡이 불편한 아빠 곁을 24시간 지키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마사지를 했어요. 아빠는 혼자서는 1cm도 못 움직였고, 엄마는 아빠의 대소변을 종일 받아냈어요. 아빠는 병원보다는 엄마 손길을 원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한순간도 놓지 않고 지켰답니다.
아빠는 배에 암 덩어리는 10킬로가 되어갔고, 40킬로 넘게 살이 빠지고, 폐에 물이 가득차서 호흡이 어렵고, 거의 전신으로 전이가 되고, 욕창이 생겨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빠는 병원이 아닌 집에 있기를 원하셔서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마지막까지 챙기셨어요. 아빠가 하늘나라 가기 4일 전에 맥박이 잘 안 잡히는 상태가 되어서야 병원으로 갔어요.
마지막 연명 약을 써야 하는데 제 생일이 다가오고 있어 혹시 아빠의 임종과 제 생일이 겹칠까 너무 고민이 되셨다고 해요. 아빠가 병원에 가시고 3일 지난 날 엄마는 저와 오빠를 급하게 부르셨고, 저희는 누워서 잠들어 보이는 아빠에게 ‘내일 소풍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했습니다. 소풍을 다녀온 다음날 아빠는 꽃이 가득한 곳에서 사진으로 우리를 만나주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가 심한 쇼크가 와서 엄마가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불러준 거였어요. 그 인사 후 아빠는 4번의 쇼크를 더 하셨고, 밤새 5번의 쇼크를 하는 아빠에게 엄마는 마음에 있는 말을 나누고 인사를 하면서 아빠를 하늘나라로 보내주셨다고 해요. 결국은 아빠의 장례가 마친 다음날이 제 생일이 되었어요.
우리를 두고 가는 게 아쉬운 아빠는 염을 할 때도 눈을 감지 못해 엄마가 붕대로 씌워달라고 하셨대요. 우리도 아빠의 그 마음과 같아요. 그래서 집에는 아빠와 함께 했던 방에 아빠 사진을 두고 그 아래 모든 선물을 올려둬요. 아빠 묘소도 늘 멋지게 꾸미는데, 얼마 전에는 공주 스티커로 엄청 예쁘게 붙여두고 왔어요. 우리 아빠 자리가 거기서 제일 멋져요.
우리 엄마는 아빠를 간병하면서 잠도 안자고 몸을 너무 많이 써서, 아빠가 하늘나라 가신 후 병원에 입원도 하셨고 수술도 했어요. 아빠를 몸으로 받쳐내느라 무리한 손목과 무릎은 너무 아파서 1년이 지난 지금도 보호대를 하고 다녀요. 그러나 엄마는 마지막까지 아빠를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기 때문에 몸이 아파도 감사하다고 했어요. 저는 그런 우리 엄마가 자랑스럽고, 끝까지 우리 곁에 있고자 했던 나의 아빠를 사랑합니다.
아빠가 있을 때 네바퀴 수레로 달려가던 우리 가족은, 지금은 아빠의 사랑을 수레에 싣고 세바퀴 수레로 달려가고 있어요. 균형 맞추느라 기우뚱하기도 하지만 엄마는 우리를 온몸으로 사랑하고 우리도 그래요. 그리고 나는 늘 아빠에게 마음의 편지를 씁니다. 온 사랑과 마음을 담아서요.
“아빠 나중에 우리 천국에서 만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