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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홉살 내 색시
  • ['투병 및 간병' 감동 수기 | 202007ㅣ글 박성구님ㅣ그림 신현민님]
오늘도 내 밥상을 힐끔힐끔 넘겨보던 키 작고 볼품없는 옆방 아줌마를 향해 ‘뭘 봐요!’ 하며 한마디를 톡 쏘아 내뱉는다. 나의 곱지 않은 소리에 아줌마는 어깨를 움츠리며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혼잣말하듯 작은 소리로 말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죄를 지어 감옥살이하고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나와 껌팔이 하던 볼품없는 아줌마는 작고 초라한 여인숙 방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처음 만났다. 내가 머물던 여인숙에 기거하던 사람들은 입에 풀칠만 겨우 하며 살만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었기에 무슨 사연으로 여인숙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서로 알려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가진 것 없이 지치고, 험한 삶들을 살아가다 보니 술을 많이들 마셨다.
나 역시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 없어 인력사무소를 기웃거리다 푼돈이 모이면 술로 탕진하는 날들을 반복하며 살고 있었다. 지친 삶에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웠고, 그렇게 지내던 중 큰 다툼에 휘말려 싸움도 많이 했다.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책하며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조차 알고 싶지 않아 허송세월 하면서도 구차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었다.
그날도 그렇게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보니 술 취한 사람이 아줌마 방에 들어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구석에서 무서워 떨고 있는 아줌마를 안심시키며, 취객을 내쫓아버렸다. 옆방에서 싸우고 난리가 나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는 여인숙 사람들... 험한 일을 겪을 때마다 아줌마는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어느 날은 주인집에 앉아 있는데 역전파출소라며 전화가 와서 가보니 아줌마는 목에 피멍이가 든채 울고 있었고, 조사실에는 술만 마시면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때 당시 왜 그랬는지 눈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경찰이 보고 있었지만 ○○○에게 달려들어 몇 대 쥐어박았다. 그자는 하도 말썽이 많아 역전에서도 귀찮아하는 존재였다. 울고있는 아줌마를 데리고 나오면서 경찰들에게 말했다. “법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이놈 나오는대로 가만두지 않을거요.” 잠시 후 비틀거리며 나오는 ○○○을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한 20분쯤 흠씬 두들겨 팼다.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얕잡아보고 괴롭히고 해코지 하는게 꼴보기 싫었다. 부족하고 약해서 못된 사람들에게 당하고 사는 아줌마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몸이 몹시 아팠던 날이다. 주인집 안방에 누워 끙끙 앓고 있을 때 옆방 아줌마가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있던 까만 봉투를 주인 할머니에게 내밀며 “할머니 이거 감자뼈 탕인데, 아무도 주지 말고 저 삼촌만 주세요.”라며 나를 측은한 듯 바라보던 못생긴 옆방 아줌마. 나는 그곳에서 자취가 아닌 하숙을 하고 있었기에 안방에서 밥을 먹곤 했다.
언뜻 듣기론 저 아줌마도 무척 어렵다던데 나를 위해 자신이 먹으려던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닌지? 순간 아픈 나를 챙겨주는 아줌마의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며칠 후에 나는 껌팔이 아줌마에게 “아줌마! 나하고 살래요?”하고 물었고, 아줌마가 수줍어하며 “예!” 라고 대답하고 나서 우리는 여인숙 작은방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수저 두 쌍, 부스터, 전기밥솥, 그릇 몇 개가 살림의 전부였지만, 우린 서로 이해하고 다독이며 살았다. 우리 집사람은 글을 모른다. 지체 장애 3급이란 것도, 고무장갑과 껌 등을 팔러 전국을 떠돌아다녔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나보다 무려 9살이나 많은 한참 누나였지만 내 손이 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애와 같아서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 때도 정말 많았다.
살아온 길이 다르기에 후회와 갈등도 컸고, 집사람이 지닌 장애는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내심을 요구할 때가 많았다. 사실 나도 험한 일을 하며 몸을 돌보지 않아 고혈압과 허리뼈 탈골 증으로 몸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새벽에 밥을 해서 집사람을 챙긴 후 인력사무소에 나가 온종일 궂은일을 하고 퇴근 후 집사람을 챙기는 일상을 반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몇 날 며칠 집사람과 헤어질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떠돌던 집사람은 내게 버림받으면 혼자서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윤귀자씨 남편 되시냐고, “예, 그런데요?” 집사람이 화장실에서 울고 있단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갔더니 집사람이 바지를 내린 채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 장이 약해서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는 집사람은 여인숙 재래식 화장실이 불편해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역전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다. 추운 겨울 도로가 빙판으로 변해 버려 어두운 눈으로 더듬더듬 길을 가던 집사람이 조심히 걷는다는 게 화장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지에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연신 잘못했다는 말만 하는 집사람에게 더러움보다 애잔함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그때 마음먹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겠다고... 없는 형편이었지만 집사람을 위해 여인숙에서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 달 방세가 60만원, 방값을 계산하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했고 겨울이라 일자리 구하기도 어려웠던 그해 겨울은 우리가 지낸 최고 추운 겨울이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화장실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임대아파트로 이사해서 살림도 많이 장만했다. 생각해보면 집사람은 나를 사람답게 살도록 만들어 주고, 바른 마음을 갖도록 해 준 고마운 존재다.
집사람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여기저기 떠돌다 신체는 병들고 망가졌지만, 세상 착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아직도 9살 소녀 같은 집사람은 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낯선 곳에 가서 잠시 떨어져 있기라도 하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우리 집사람이 점점 병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고혈압, 당뇨 위험 수위, 백내장, 거기다 치아도 아래쪽에 두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아 소화력이 안 좋은데 얼마 전에는 갑자기 쓰러지기까지 해서 119 구급차를 부른 것이 여러 번... 목욕 중에도 헛구역질을 하고, 힘없이 풀리는 눈을 스르르 감으며 쓰러지기에 얼마나 놀랐던지... 아파도 표현을 못하는 집사람이 속이 답답하다기에 며칠을 소화제만 먹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협심증 때문이란 걸 알았을 때 참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집사람과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며 살아온 날이 10년이 되어 간다. 정신연령이 열 살도 안되는 아홉 살 내 색시. 호강은 아니더라도 서로 아끼고, 다독이고,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을 내가 꼭 지켜주고 싶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사람과 혼인 신고를 했다.
나만 믿고 사는 사람인데 내가 험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고 죽기라도 하면 길거리에 나 앉을게 뻔한 집사람을 위해 한 남자의 아내로 떳떳하게 보상이라도 받게 해 주고 싶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집사람에게 세뇌하듯 매일 말한다. “여보 내가 죽으면 아무도 믿지 말고 복지관 선생님하고 얘기해서 보상받은 걸로 살아야 돼.” 나는 잠결에도 몇 번씩 집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여보! 괜찮아?”, “응” 대답을 들어야 마음이 놓인다.
어느 날 갑자기 집사람이 나를 두고 먼저 떠날까 봐 겁이 난다. 집사람 곁에서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 버림받은 집사람과 고아인 나. 의지할 곳 없던 두 사람이 만났지만 늘 감사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집사람과 내가 약속한 것이 있다. 집사람 나이가 70이 되는 4년 후에는 시골 허름한 집이라도 얻어 텃밭에 먹을 것을 심고 마당엔 집사람이 좋아하는 강아지를 키우고, 그렇게 살기로...
세상과 이별할 때가 다가오면 집사람 먼저 보내고 나도 곧 따라가겠노라는 약속도 했다. 집사람과 나는 소박한 우리 둘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한없이 부족한 나를 향해 웃어주며 “우리 남편 ○○○씨 최고!, 내가 사랑하는 우리 남편!” 이라고 말해주는 가족이 있어서 힘이 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어디선가 들어본 그 말을 나는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