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0일은 저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제가 코로나19 확진자로 판정 받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날 9일에는 암 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병원에서 간호하시던 어머니가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으시고 원자력병원으로 격리되어 가셨고, 다음 날인 10일 저와 아버지 또한 양성판정을 받아 아버지는 00대학병원으로 전 생활치료센터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검사 결과였습니다. 사실 전 지난 3월 5일부터 고열은 없었지만 감기몸살과 목감기 증세로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주말을 지나 월요일인 9일까지 집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화요일인 10일에 출근준비를 하던 중 어머니의 양성판정 통보를 전해 받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런 증상이 없으셨던 어머니가 양성판정을 받으시다니.....거기다가 아버지와 나까지 매스컴에서 매일의 집계되는 코로나 확진자 수에 포함되다니... 이게 진짜 현실인가?
저의 확진 판정으로 제가 생활복지사로 근무하던 지역아동센터에도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센터로 방문하였던 이용자와 외부방문자 그리고 밀접 접촉자들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도록 연락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센터 이용 아동 몇 명과 종사자가 양성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 속에서나 보암직한 핵폭탄이 하나도 아닌 여러 개가 저를 중심으로 한 세상에 정신없이 터진 것과 같았습니다.
갑자기 파란 하늘은 새까만 구름으로 뒤덮이고, 저의 두 발을 지탱해주던 굳건한 땅들은 호숫가의 살얼음이 쫙 소리와 함께 깨어져 깊은 물 속으로 내려앉아 버리는 듯했습니다.
확진 판정 후 몇 시간에 걸쳐 보건소 검사요원들에게 저의 확진 판정 전 열흘간의 시간대별 이동경로와 만났던 사람들을 빠짐없이 억지로 기억해 내야했고, 신용카드번호와 버스카드 번호 및 저의 얼굴 사진을 전송해야 하는 과정으로 이어져 마치 죄인이 취조당하는 듯한 낯선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힘든 건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부담감과 암 환자이신 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염려로 그 중압감은 저의 가슴을 너무나도 아프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게 내리 눌렀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이런 일들의 시작점이 생겨난 걸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계속된 질문들은 저의 머리와 가슴을 복잡하게만 만들 뿐 어느 것 하나 명확한 답은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센터는 구청으로부터 임시폐쇄명령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센터장님과 전 각자 생활치료센터에서 지자체 담당 공무원과 보건소의 요청에 따라 외부인 명단과 센터 아동 명단 등 필요 서류들 등 요구하는 서류를 이메일로 보내야 했습니다.
또한 사회복지실습을 하기로 한 모든 실습생들에게 실습이 불가한 이유를 설명하였고, 센터의 부모님들께 민망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할 수 만 있으며 피하고만 싶은 어려운 전화 통화를 하면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런 부담감으로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센터의 몇몇 어머니들은 오히려 저에게 “선생님 힘내세요. 빨리 나으셔서 센터에서 뵈어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잖아요.”라는 말들과 격려의 문자를 보내주셔서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면서 흐느껴 울기도 했습니다.
확진이 된 센터의 이용 아동들은 14세미만으로 혼자 입소가 안 되어 보호자가 함께 입소를 하였고, 격리된 아이들의 건강과 심리 상황을 확인하고자 전화를 했을 때 다행히도 모두 아프지 않고 괜찮다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초등학교 5학년 아이는 “선생님, 여기 맛있는 간식이 많이 나와서 좋아요. 그리고 게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구요.”라고 천진난만 이야기하면서 웃기에 저 또한 오랜만에 함께 웃을 수 있었습니다.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한지 5일이 지날 무렵 코로나로 인해 잃었던 저의 미각은 서서히 돌아와서 제공받은 음식과 간식의 맛을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느끼는 경험으로 함께 방을 쓰던 여중생과 서로 먹는 즐거움을 찾아 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계속되었던 잦은 기침도 약국에서 판매하는 일반 기침약으로 조금씩 차도를 나타내어 매일 두 번의 자가체크에는 증상이 없음이라는 표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터진 핵폭탄급 당혹감과 불안과 공포감은 24시간이라는 긴 하루가 여러 번 지나가면서 조금씩 가라앉는 희뿌연 먼지처럼 짙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정리가 되어가는 안도감을 경험하였습니다.
부모님도 열이 오르내리는 증상이 반복되기는 하셨지만 가족 간의 따뜻한 안부와 위로의 말, 그리고 간호사들의 보살핌을 힘입어 잘 버티셨고 센터의 아이들과 어머님들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뒤에 격리생활에 나름대로 잘 적응해 갔습니다.
치료센터의 격리생활가운데서도 나름 일상이기에 룸메이트인 중2 여학생과 식사 때마다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들었습니다. 그리고 배달음식에 질려갈 무렵 우리는 치료센터를 나가는 날에는 꼭 소고기를 구워 먹을 것이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중학생 동갑내기 친구처럼 수다를 떨었습니다.
치료센터에서의 하루는 너무나 단순해서 기상과 함께 하루 세 번의 식사벨 소리와 함께 문 앞에 놓여진 포장음식을 방으로 들여와 먹고 정리하여 문 앞에 방문 앞에 두고, 하루 두 번 자가 체크를 한 뒤 보고를 하고, 4평가량의 작은 방을 청소하였습니다.
그 마저도 마치고 나면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창 밖 세상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그 때의 심경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소나무 가지사이로 오가는 새들과 저 멀리 마스크를 쓰고 바쁜 듯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창밖 세상엔 노란 봄꽃들이 피어났고, 핸드폰 너머에 있는 친구들이 개나리와 진달래꽃이 만발해 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땐 정말이지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습니다.
그 날들을 회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전 그렇게 그리던 바깥 세상에 나온 지 넉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치료센터에서 퇴소 후 저를 지켜본 주변의 친구들은 메스컴을 통해서 본 코로나19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실제보다 더 크게 느꼈던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존재들은 대부분 실체가 보이지 않기에 들려오는 주변의 소문들로 실제보다 더 덩치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은 늘 뜻하지 않는 어느 날 우리가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상황들을 안겨다 줍니다.
그때에는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결하다보면 어느 새 작아진 문제의 실체를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이 현관문을 열면 인사와 함께 체온을 측정하고 손을 씻도록 지도하는 작은 일상들이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마스크속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올해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방역으로 고생하시는 여러분들의 수고를 생각하면서 가족들과 아이들이 건강하며,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모두를 위해 하루 빨리 이 코로나19가 지나가서 마스크와 속 시원한 이별을 하고 이전의 생활들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