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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일러실 아이들
  • ['내 인생 멘토, 멘티와의 소중한 이야기' 수기 | 202208ㅣ글 김도전님ㅣ그림 정하은님]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살을 베는듯한 바람과 차가운 한기가 가득한 추운 새벽이었다. 어릴 적 이혼한 집안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형과 함께 가출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추위를 피해 머물 곳을 찾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한겨울의 찬 바람은 우리를 곧잘 찾아내었고 추위에 떨리는 윗니와 아랫니는 마치 학교에서 배운 캐스터네츠처럼 딱, 딱딱 소리를 내었다. 아침부터 들렸던 나의 꼬르륵 배꼽시계 소리는 먹을 것을 달라고 항의라도 하는 듯 시간과 상관없이 울려댔고 이제는 굶주림에 속이 쓰리고 아프기까지 했다.
우리는 힘들고 지쳤지만 오랜 시간 돌아다닌 끝에 오늘 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곳은 옥상이 있는 이층집이었고 어중간한 높이의 콘크리트 담을 넘으면 마당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옥상까지 이어진 철제계단을 타고 올라가 대략적인 건물의 구조를 확인하고 2층으로 내려왔다. 혹시라도 집주인에게 걸리거나 도망가야 할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동선을 확인한 것이다. 형은 계단 옆에 있는 차가운 철문을 열었고 안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곳은 이 집의 보일러실이었다. 쾌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고 문을 닫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9살과 10살 연년생인 두 형제에게는 충분히 무서운 장소였지만 우리는 매섭게 부는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캄캄한 보일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문을 닫고 한쪽 구석 바닥에 앉아 서로 안아주며 몸을 녹인 후 그렇게 겨우 잠이 들었다.
지금도 그때의 쾌쾌한 기름 냄새와 벌어진 문틈에서부터 발목 사이로 흘러 들어오던 차가운 냉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시간이 제법 흐른 뒤 나는 배가 아파서 잠에서 깼다. 큰 볼일을 처리하고 다시 잠을 자야 했지만, 문밖에서 들리는 귀신이 우는 듯한 바람 소리가 무서워 자고 있던 형을 깨워 볼일을 처리하러 같이 가달라고 했다. 형은 쏟아지는 잠결을 이기지 못했고 나에게 혼자 옥상에 가서 조용히 처리하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결국 보일러실 문을 열고 형이 보이는 곳 앞에 자리 잡고 조용히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형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짜증 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나는 한바탕 볼일을 마친 후 다시 보일러실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아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누군가가 보일러실 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문 앞에는 집주인으로 추정되는 노부부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짧지만 긴 침묵이 잠시 이어졌고 그때 한 손에 빨간색과 노란색 솔을 교차로 붙여 만든 플라스틱 빗자루를 든 할아버지가 물었다. “혹시 여기 앞에 있는 똥도 너희들이 싼 거니?”라며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우리 형은 아직도 내가 싸질러놓은 똥 때문에 들켰다고 생각한다. 이후 노부부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경찰서가 아닌 노부부의 이층집 안이었고 아무 말 없이 밥과 반찬을 차려 우리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두 분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고 상에 있는 밥과 반찬을 모두 비울 때쯤 자초지종 설명을 듣기를 원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할아버지는 천 원짜리 몇 장을 나의 손에 쥐여 주셨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가서 아빠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다시는 가출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밖을 나섰다. 하지만 우리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다.
두 형제에게는 이후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당시 노부부의 따뜻한 마음은 서서히 잊혀갔다. 그렇게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때의 일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다. 가끔은 서로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그중에 빠지지 않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층집의 노부부 이야기이다.
한 번은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이층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노부부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현재 그곳은 재개발 지역이라 이층집은 물론이고 주변을 둘러싼 낮은 콘크리트 담벼락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릴 적 찬 바람을 맞으며 헤매던 동네와 노부부의 이층집은 잘게 부서져 옛 추억이 되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자리에는 다시금 아파트가 올라오고 빽빽하게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누군가는 나처럼 따뜻한 정을 받고, 누군가는 따뜻한 마을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연탄을 나르고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는 것만이 봉사인 것은 아니다. 정해지지 않은 누군가에게 배부른 한 끼와 손에 쥐여준 천 원짜리 몇 장도, 따뜻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도와준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서 따뜻한 이웃, 친구, 봉사자로 오랫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