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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희망을 보다
  • ['내 인생 멘토, 멘티와의 소중한 이야기' 수기 | 202208ㅣ글 정승권님ㅣ그림 최유진님]
“젊은이~ 혹시 멸치쌈밥 먹어 봤어?” 그날, 푸근한 남도를 닮은 할머니는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디쯤에 서 있던 이방인에게 멸치쌈밥을 권했다. 할머니의 따스한 배려와 관심은 나에게 어둠 속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한줄기 빛이 돼주었다. 스무 살 무렵, 내 삶은 어둠 그 자체였다. 불우한 가정사가 잿빛 그물이 되어 항시 나를 옥죄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쁜 숨과 함께 차오르면 이 연옥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어느 날 나는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기차역으로,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하지만 감정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침체되고 악화되기만 했다. 때때로 삶을 내려놓고 싶다는 충동마저 일었다.
수중에 돈이 거의 다 떨어져갈 때쯤 나는 한 바닷가 마을에 닿았다. 터벅터벅. 알 수 없는 소외감과 허탈함을 안고 남해 바다를 가로질러 다리를 건넜다. 다리 밑에 출렁이는 바다를 보자 불순한 생각이 들었다. 두 뺨 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가 볼 새라 얼른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드는데, 앞에서 다가오던 할머니 한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그냥 지나쳐 갈 줄 알았던 할머니는 발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대뜸 “젊은이, 혹시 멸치쌈밥은 먹어 봤어?”라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당황했던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게 뭐예요?”라고 되물었다. 멸치쌈밥은 이름조차 생소한 음식이었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멸치쌈밥에 대해 소개하면서, 남해 멸치가 다른 지역의 멸치보다 유달리 크기가 커서 기름지고 맛이 좋다고 했다. 일단 남해에 왔으면 멸치쌈밥은 꼭 먹어봐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음식 얘기를 들어서일까, 생과 사의 경계에 서 있는 와중에도 나의 배꼽시계는 정확하게 배고픔을 알렸다.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저 멀리 고기잡이배에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처럼 우렁차고 컸다. 할머니는 다리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우리 집인데, 시간 되면 멸치쌈밥이나 한술 뜨고 가!”라고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요.”라고 핑계를 댔다. 중대 결심을 앞둔 나에게 그 순간 음식은 사치 같았기 때문이다. 내 말에 수긍할 줄 알았던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남한테 돈 받을 정도로 대단한 찬은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말고 따라와!”라며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며 할머니를 따라갔다.
할머니의 집은 소박하면서도 아늑했다. 잠시 시골집이 주는 안락함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할머니가 푸짐하게 상을 차려 내왔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지 고민하던 찰라, 할머니는 “이게 멸치쌈밥이야.”라며 냄비에 담긴 음식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멸치쌈밥은 커다란 통멸치에 고춧가루와 마늘, 시래기 등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낸 찌개였다. 평소 볶음으로나 먹어봤던 멸치를 찌개로 끓여낸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멸치쌈밥이 남해의 토속음식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빨갛게 양념이 밴 큼지막한 멸치를 한 입 떼어 먹으니 입안에서 감칠맛이 확 돌았다. 멸치는 육질이 보기보다 단단했다. 생멸치를 사용했는데도 비리지가 않고 담백했다. 할머니는 이번엔 상추에도 싸먹어 보라고 가르쳐주었다.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상추에 멸치를 올리고 국물을 한 숟가락 얹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상추가 상큼함을 전해주고, 얼큰하고 맵싸한 국물이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거기에 할머니가 따라주는 시원한 막걸리까지 한 잔 들이켜니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두운 감정들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나는 멸치쌈밥과 함께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그간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거친 감정들이 부드럽게 다스려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술기운과 서러움에 취해 내가 처한 상황과 다리 위에 서서 했던 생각들까지도 모두 할머니 앞에 털어놓았다. 묵묵하게 이야기를 다 들은 할머니는 오래 전 도시로 떠난 손자 얘기를 해주었다. 아들이 이혼을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손수 거둬 키운 손자가 있었는데, 성인이 되어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떠나고선 끝내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손자가 멸치쌈밥을 참 좋아했거든! 젊은이가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니까 우리 손자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기분이 좋아.”
할머니는 손자한테 해주지 못한 말을 내게 꼭 해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까 절망이란 놈은 수시로 찾아오더라고. 그런데 그것도 모두 긴 삶 속에서 그저 티끌 같은 일일 뿐이야. 그때만 잘 넘기면 좋은 날은 반드시 찾아와! 쓴맛도 인생이고, 단맛도 인생이거든!” 할머니의 묵직한 한마디에 가슴 한편이 뻐근했다. 내 등을 토닥거리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의 정이 느껴졌다. 이제는 나도 어두운 과거의 감정을 털어내고 남들처럼 밝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싶었다. “열심히 잘 살아. 남해에 올 일 있으면 우리 집에 꼭 다시 들러서 멸치쌈밥 먹고 가고!”
할머니의 위로와 응원을 뒤로 하고 집에서 나와 다시 남해 다리 위에 섰다. 다리를 다 건널 때쯤엔 누군가를 향한 원망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도 사라진 상태였다. 자칫 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었던 그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할머니의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나와 세상을 다시 이어준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세상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쉽사리 좌절하지도 않고, 가볍게 들뜨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었다. 2년여 후 나는 다시 한 번 할머니를 찾아뵈러 갔다. 나를 알아보고 바다와 같이 푸근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할머니를 향해 “감사 인사드리러 왔어요!”라고 말했다. 밝아진 내 얼굴을 보고 “고맙다”고 말해주던 할머니의 따스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도 할머니는 내게 멸치쌈밥을 해주셨다. 그때 내가 본 할머니의 미소와 멸치쌈밥은 나를 어둠에서 구하고, 다시 살게 해준 희망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