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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심밥의 온도
  • ['내 인생 멘토, 멘티와의 소중한 이야기' 수기 | 202208ㅣ글 김하정님ㅣ그림 박효빈님]
아버지가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안 건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였다. 외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2주에 한 번 집에 왔지만, 개인 공간이 없는 작은 집에서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학생이던 동생에게 아빠가 아프냐고 물었고, 허리를 다치신 이후 집에 누워 있는 날이 많다고 했다. 얼핏 들은 엄마의 한숨 섞인 걱정은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허리를 다쳐서 일을 못하는데, 일단 빌려야지 어떻게 해.” 얼마 후 급식비 통지서가 나왔다. 기숙사생이었던 나는 세 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고등학생이던 내게 한 달 치 세 끼 비용은 과해 보였다. 누구도 뭐라 한 적 없었지만, 이 고지서가 짐이 되어 아빠의 허리를 아프게 할 것만 같았다. 점심 한 끼 정도는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고 한 끼 배고픔으로 통지서의 숫자를 줄일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이후 점심시간에 나는 혼자 교실에 남아 밀려있던 공부를 하곤 했다. 전날 기숙사 야식이 나온 날이면 남겨두었다가 점심에 먹었다. 친구들에게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고, 부모님께는 공부를 잘해서 비용 일부를 지원받았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아무도 내 비밀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교무실로 불려갔다. "왜 점심시간에 교실에 남아 있니. 점심 신청 안 했던데 이유가 있을까?" 주임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짧게 "다이어트해요."라고 답했다. 신체검사 기록지에 저체중이 기록되어 있음은 나에게 상관없었다. 선생님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한번 물으셨다. "솔직하게 말해줄래. 괜찮으니까." ‘괜찮으니까’라는 말에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단단하지만 따뜻한 그 한 마디는 나의 빗장을 무너뜨렸다. 나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생님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곤 "알겠다."라고 짧게 읊조리셨다. "...해서요." "뭐라고?"
나는 다시 한번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빠가 힘들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선생님은 더이상 묻지 않으셨고 아래의 말만 남기고는 자리를 뜨셨다. "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내일부터는 걱정 말고 밥 먹으러 가. 알았지?" 나는 선생님이 나가신 후 꽤 오랜 시간 홀로 울었던 것 같다. 뭐가 서러웠던 건지, 고마웠던 건지 지금도 그 감정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감정이 복잡했다.
아직은 어린아이였던 나는 부끄럽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밥은 고마웠다. 다음날부터 나는 다이어트가 끝났다며 친구들에게 급식을 먹으러 가자고 할 수 있었다. 이후 내게 주어진 것은 따뜻한 점심뿐만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신 건지 더 이상 급식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열심히 공부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후 선생님께 자주 찾아갔고 선생님은 그때마다 교사용 문제집을 챙겨주셨다. 나는 쉬는 시간에 교사용 문제집에 적혀 있는 답을 컴퓨터 사인펜으로 지운 후 자율학습시간에 풀었다.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게으를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갔고, 고3이 된 나는 수능을 치르게 되었다.
"선생님 저 수능 잘 봤어요." "잘 했다. 정말 잘 했어." 수능 시험 후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갔고, 나는 누구나 입학하고 싶어 하는 명문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것은 분명 나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었다. 급식비 통지서의 숫자를 배고픔으로 메꾸려 했던 어린 마음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대체되었고, 덕분에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대학생이 된 나는 종종 모교에 들러 후배들을 위해 조언하며,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떤 수업이 좋은지에 대한 조언 같은 선배의 작은 도움부터, 학생들을 위해 기꺼이 장학금을 내놓은 사업가분들의 다소 큰 도움까지.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음을,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음을 기억하며 많은 일들을 헤쳐 왔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돕는 것의 진짜 의미를 처음 가르쳐 준 건 선생님이었다.
대학시절 나는 남들보다 많은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초등학교 담벼락에 벽화그리기부터 인도의 불가촉 천민집단 아이들을 위한 예체능 교육활동, 황사를 줄이기 위한 사막 녹색화 작업까지. 가난했지만, 내가 가진 재능과 젊음으로 베품을 실천했다. 나밖에 모르던 내가 이런 일들을 하기 시작한 건 내가 받아본 그 손길 때문이었다.
“선생님, 저 취직했어요.” 학업을 끝낸 후 나는 빠르게 경제 전선에 뛰어들었다. 현재 회사의 최종 합격 발표가 나던 날 지하철에서 나는 시골 소녀가 서울에 훌륭하게 자리 잡았음을 선생님께 알렸고, 선생님은 본인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직장인이 된 이후 나는 아이들을 위해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주셨던 도움이 나에게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큰 것이었는지를 잊지 않으며 작은 것이라도 베풀고 살려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선생님이 어떻게 급식비를 처리하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묻지 않았고, 답변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나는 그가 베풀었던 따뜻함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선생님이 베풀어준 손길이 없었다면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이제는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마움, 그리고 따뜻함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세상은 누군가 베푼 온기를 시작으로 조금 더 따뜻해지는 것이 아닐까.
“O만원이 결제되었습니다. 후원자님 감사합니다.” 오늘 먹을 점심을 준비하는데 결제 알림 문자가 스마트폰 화면에 나타난다. 알림 소리로 방의 온도가 조금은 높아졌음을 느끼며 나는 마지막 반찬을 테이블 위에 놓은 후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았다. 따뜻하게 준비된 점심을 바라보던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문득 내가 고등학생 시절 받았던 공짜 점심밥보다 따뜻한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