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감별소 담벼락은 열여섯 해 사는 동안 가장 높은 높이였다. 그래도 봄이 왔다고 개나리가 피더라. 팔뚝에 새기다 만 연탄제 문신은 뱀 혓바닥처럼 시커멓게 스멀거렸다. 언니가 들고 온 펄펄 끓는 만둣국이 냄비 째 내 무릎에 쏟아졌다. 살점이 벗겨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병원에 갔다면 아마도 2도나 3도 화상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부엌 찬장에 들어있는 반찬이라야 단무지 짠지 몇 조각이 전부이던 가난한 집구석, 아비규환으로 아무리 비명을 질러대도 어머닌 나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곰팡내 풍겨대는 단칸방 구석에 누운 내 무릎에다가 몇 날 며칠 쭈그리고 앉아 소주와 간장만 발라주었다. 그래도 소주 간장 그 무식한 것들이 약은 된 것인지 절룩이며 보름 만에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곧 어머니가 쓰러졌다. 그 동안 몇 번이고 오른쪽 가슴을 쥐어뜯으며 혼절하던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가자마자 이내 돌아와 새벽녘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 나이 마흔일곱 이었다. 어머니는 간암말기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암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공동묘지에 묻고 돌아온 날, 부엌 시멘트 바닥에 앉아 내 무릎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내 무릎, 괴물같이 달라져버린 내 무릎, 나 이 꼴로 학교를 어떻게 가지? 반 아이들이 마구 놀려 댈 텐데. 마치 전염병이라도 걸린 환자처럼 대할텐데. 게다가 나는 이제 엄마도 없잖아. 아마 더 놀리고 더 멀리하며 다들 나를 따돌리겠지. 공부도 학교도 집도 모든 게 싫어졌다. 나는 방세 주려고 공장에 다니는 언니가 서랍장 안에 넣어 두었다던 돈 이만 원을 훔쳐 집을 나왔다.
그리곤 껄렁거리는 아이들 패에 들어갔다.
정확히 만이천 원이 OO언니와 내가 훔친 돈이었다. 아는 오빠 집에 갔다가 책갈피에 꽂혀 있던 돈을 훔쳤다. 돈을 훔쳐 나와 길을 가는데 우리의 행색에 의심을 품고 접근한 파출소 직원들에게 잡힌 것이었다. 주소와 다니는 학교를 대라는 파출소 순경의 추궁에 나는 절대 내 집 주소와 학교를 말하지 않았다. 물론 OO언니도 마찬가지였다.
OO언니와 나는 경찰서로 넘어갔고 특수절도라는 죄명으로 여경으로부터 몸 검사를 거친 후 2층 여자들이 우글대는 유치장에 들어갔다. 유치장 문이 열리자마자 걸레를 입에 물고 뺑끼통까지 기어야 했다. 그리곤 가차 없이 두들겨 맞아야 했다. 유치장 방장은 나이 쉰에 사기 전과가 무려 11범이었다. 집에 알리지 않았으니 마아가린 휴지 하나 OO언니와 내 앞으로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하여 거지같은 어린년들이라며 맞고 또 맞았다.
그럴 때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집인들 여기보다 나은 게 뭐 있냐며 OO언니와 나는 숨 숙인 채 속닥였다.
유치장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포승줄로 묶여 검찰청으로 넘어 갔다가 다시 유리창 모두 막힌 버스를 타고 또래들 바글거리는 곳에 내려졌다. 소년감별소였다. 열여덟 소매치기3범 열일곱 폭력전과2범 젖살 포동한 열셋은 OO언니와 나랑 같은 절도범... 그곳에선 교도관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무섭게 생긴 몇 분 중 가장 젊고 인상이 좋은 여선생님이 OO언니와 나를 불러 집주소를 대라했다. 이제 와서 집주소를 댈 거였으면 애당초 파출소에서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집주소를 더욱 더 철저히 감추며 아버지든 언니든 면회 올 일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먼저 들어온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선 가족이 면회 오지 않으면 소년원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OO언니와 나는 100% 소년원으로 갈 거다. 개나리도 피지 않을 더 사방 막힌 그 곳으로 갈 거다. 까짓 거 가면 되지 뭐. 얼마 후 소매치기3범과 폭력전과2범이 소년원으로 갔고 열셋 절도범은 제 어머니를 따라 훈방되었다. 이제 곧 OO언니와 내 차례가 될 것이다. 재판을 며칠 앞둔 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와서 새기다 만 문신을 제거해 주었다.
그날 감별소 식당 식판에 나온 꽁치김치찌개 맛이 왜 그리 좋았을까. 그날 저녁 점호 전, 막내 여선생님은 이리 와봐 OO언니와 나를 불러 세웠다. ‘며칠 지나면 어버이날인데 부모님께 카네이션 달아드린 적 있지?’
‘네.’
‘빨리 나가서 또 달아드려야겠지? 그렇지?’
‘....................’
OO언니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나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 어버이날을 맞아 감별소 수감소년 백일장이 감별소 마당에서 열렸다. 백사십여 명이었던가, 이백사십여 명이었던가, 아무튼 내가 1등을 차지했다. 다음날 OO언니의 아버지가 감별소로 왔고 막내 여선생님은 나만 따로 불러 내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너는 여기에 와 있을 애가 아니야.’
드디어 재판 날이었다. 아버지가 오셨으니 OO언니는 당연히 나갈 테고 나는 소년원으로 가겠지, 멍한 모습으로 판사 앞에 앉아 있는데 저 쪽에서 막내 여선생님이 사춘기의 천지분간 없는 자존심 같은 건 버리라는 듯 나를 향해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막내 여선생님이 재판장님께 한 말씀만 드리게 해달라며 간청했다.
‘이 아이는 백일장에서 1등을 한 아이랍니다. 그 글을 한 번만 읽어봐 주십시오. 부디 소년원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가 마음 새로 다져 반드시 착하고 모범된 사람으로 커갈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십시오.’
- 돈 오십 원을 아끼느라 한 시간을 걸어 학교로 갔다. 그렇게 며칠 모아 종이로 만든 이백오십 원짜리 카네이션 두 개를 샀다. 오백 원짜리 생화 카네이션을 사고 싶었지만 아침밥도 못 먹고 학교로 가는 그 길은 너무나 멀었다. 아버지는 종이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산불조심 완장을 팔에 차고 산으로 들어 가셨다. 어머니도 종이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식당으로 설거지를 하러 가셨다. 나들이 온 단란한 가족들이 낸 산불 때문에 아버지는 그날, 얼굴 온통 그을음이 시커먼 채로 집으로 오셨다. 그래도 종이 카네이션은 빨간 그대로였다. (이하생략)-
판사는 막내 여선생님이 내민 내가 쓴 글을 읽었다. 그리곤 금테 안경을 콧잔등 위에 다시 내려놓더니 단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이번만 봐주는 거다. 알았나?’
그렇게 석방이 되어 OO언니는 아버지를 따라 갔고 나는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그러자 막내 여선생님이 버스 타고 가라며 돈 이천 원과 초코파이 두 개를 주었다. 그리고 또 가방에서 붉은 카네이션을 꺼내더니 내 손에 가만 쥐어 주었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달아드려라. 그리고 여긴 다신 오지 마 알았지?’
어머니 돌아가신 날 만큼이나 나는 펑펑 울었다. 멀어지는 담벼락에 내 이름 석 자 도로 봄 오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무릎이 징그럽다며 놀려도 엄마 죽었다고 멸시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막내 여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감별소 백일장에서 1등을 한 내 글이 책에 실려 전국 소년수감소로 전달되었다 했다.
그리고 20년 뒤 어느 날, tv를 보다 시선이 멈췄다. 소년범죄전과 5범이었다는 한 남자, 소년원에서 우연히 책에 실린 글 하나를 보고 마음 고쳐먹었다 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사회로 나왔다 했다. 바로 내가 썼던 그 글이었다.
그리고 20년 뒤 어느 날, tv를 보다 시선이 멈췄다. 소년범죄전과 5범이었다는 한 남자, 소년원에서 우연히 책에 실린 글 하나를 보고 마음 고쳐먹었다 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사회로 나왔다 했다. 바로 내가 썼던 그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