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행거는 화려했다.
변변한 장롱 하나 들일 수 없었던 좁은 단칸방.그 알량한 형편과는 달리 엄마의 행거에는 총천연색의 옷들이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어린 시절엔 엄마의 회전행거를 돌리며 빨주노초파남보를 신나게 외치고는 했었다.
안타깝게도 그 무지갯빛의 환상이 깨어버린 건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이었다. 까만 밤이 되어야 일을 나가는 엄마를 동네 사람들은 이혼당한 술집 여자라 비아냥거렸고 열 살이 되던 무렵에야 나는 엄마 앞에서 엉엉 울며 물었다.
“영아! 엄마는 가수야. 노래를 부르는 가수! 사람들이 잘 몰라서 하는 말일 뿐이야. 엄마는 부끄러운 일을 한적이 없어!”
우리 엄마는 밤무대 가수였다. 엄마는 항상 당당하고 씩씩했지만 나는 엄마가 창피해져만 갔다. 엄마의 짙은 화장이 남다른 옷차림이 점점 신경 쓰여 미칠 것만 같았다. 엄마와 외출을 할 때면 슬며서 엄마의 손을 놓고 먼발치에서 걸었다.
내가 또래들보다 더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 엄마는 밤무대에서 해고를 당했다. 매일 비린 날달걀과 쓰디쓴 도라지즙을 삼키며 노래 연습을 하던 엄마의 목소리에는 변함없었지만 마흔을 훌쩍 넘긴 엄마의 나이가 문제라고 했다. 엄마는 다른 엄마처럼 아침에 나가셔서 저녁에 돌아오시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밤무대 가수 엄마보다야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의 모양새가 훨씬 나아 보였으니까. 지긋지긋한 엄마의 무대의상도 사라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무대복을 손질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하셨다. 동대문 시장에서 산 싸구려 큐빅도 갖다 붙이고 온갖 레이스도 달아 풍성하게 박음질하셨다.
언젠가 부터 엄마는 쉬는 날 새벽이면 동네 떡집에서 맞춘 떡을 머리에 이고 돌아오셨다. 부스스 잠에서 깬 내게 온기가 남아 있는 떡을 건네주시며 엄마는 분주히 외출 준비를 하셨다. 엄마 쉬는 날인데 또 어디가? 라는 나의 짜증에 엄마는
“엄마는 노래하러가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엄마는 노인정으로 요양병원으로 노인시설로 엄마는 자원봉사를 다니고 계셨다. 나는 기가 막혔다. “엄마! 자원봉사를 한다고? 누가? 엄마가? 엄마는 진짜 몰라? 우리가 불우이웃이야. 곰팡이 피는 지하 방에 살면서 누가 누굴 도와?”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0년째 월세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정도 그러했지만 갑상선 이상으로 앓으시면서도 봉사까지 나가는 엄마가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앞으로는 가지 마시라고 적어도 식당 쉬는 날은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냐는 나의 성화에 엄마는 “영아! 엄마가 하는 건 봉사가 아니야.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 엄마의 노래를 즐겁게 들어 주시는 어르신들을 보는 것도 좋고 엄마가 아직 쓸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좋아서! 좋아서 하니까 힘도 나고 오히려 덜 아픈 거 같은걸? 그러니까 걱정마!”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여전히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도 고집을 꺾지는 않으셨다.
고등학교 졸업도 전에 취업을 했다. 대학교를 가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와 선생님의 권유에도 나는 가난에서 빨리 벗어나는 방법으로 취업을 선택했다. 사회는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했고 성인이 되어버린 삶은 상상보다 훨씬 더 무겁게만 여겨졌다. 어느 날 막연히 엄마를 따라나서고 싶어졌다. 동네 떡집에서 떡 한 상자를 받아 들고 어르신들이 좋아하실만한 사탕이며 젤리, 달근한 뻥튀기도 한아름 챙겨 엄마의 고물차에 실었다. 이상스레 소풍 가는 날처럼 설렜다. 한 시간여를 달려 어느 요양병원에 도착했고 친근한 얼굴들이 보였다. 엄마와 함께 가수 생활을 하셨던 숙희 이모와 기타를 치시던 동수 삼촌이였다. 그리고 같은 곳에서 주방일을 하셨던 영자 이모까지. 그렇게 네 사람이 자원봉사 멤버라고 하셨다.
음식을 나눠 담으며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미 어르신들은 하나둘 1층 식당을 내려오고 계셨다. 그리고 그 뒤로는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은 엄마가 보였다. 진주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된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내 눈에도 가수 같았다.
엄마는 큼지막한 글씨로 가사를 적어 놓은 종이를 어르신들에게 하나하나 나누어 주셨다. 구성진 트로트에 손뼉을 치시고 어깨를 들썩이시며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어르신들은 마치 아이처럼 해맑았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서글픈 노래를 부르실 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노래를 부르는 엄마의 얼굴은 엄마의 의상보다 더 빛나고 있었고 어느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리고 여느 할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엄마의 노래가 불씨가 된 듯 그날의 요양병원은 참으로 따스했다.
그리고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엄마의 말을 나는 단번에 완벽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엄마를 따라나섰다. 엄마는 어르신들의 가수였고 딸이었고 이웃이고 친구였다. 나에게도 수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생겼다.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울고 웃는 모든 순간은 봉사가 아닌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엄마와 나는 평범하지 못한 세월들을 살아왔다. 엄마는 이혼녀란 이름표를 달고 딸 하나를 키우느라 고생스러운 나날들을 나 또한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의 아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그때는 정녕 몰랐다. 봉사와 나눔이란 것은 TV 속 유명한 가수나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되는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타인의 일로만 여겼었다.
허나 내가 만난 나눔을 봉사하는 이들은 외려 대부분 평범한 이들이였다. 아니 우리만큼 어려운 이들도 있었다. 인생의 고통과 아픔을 겪어 봐 더 잘 알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모여들었다.그리고 나눔과 봉사를 받고 있는 이들도 그저 우리의 이웃일 뿐이었다.
엄마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며 알게 되었다. 따뜻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겐 반짝반짝 빛이 난다는 것을. 그런 따스한 손길 덕분에 이 세상은 오늘도 빙글빙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렸을 적 내가 보았던 엄마의 오색찬란한 회전행거처럼.
사랑을 나누는 진심어린 마음이 모이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무지개가 탄생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