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이었다. 우리 김밥집의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쌍의 남녀가 대뜸 하는 말이 있었다.
“아주머니, 그간 안녕하셨어요?”
그들의 말에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들이 다시 하는 말이 있었다.
“아주머니, 저희 연수와 연희 남매예요.”
남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자세히 얼굴을 살폈다. 그러자 예전 어릴 때의 모습이 얼굴 속에 아직도 남아있었다.
“아이고, 너희들이 언제 이렇게 컸니.”
그러면서 반가운 마음에 남매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누나인 연희가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그 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희들은 그 때 그 카드로 아무 곳에서나 김밥을 살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가맹점에서만 쓸 수 있는 카드였더라고요.”
“뭐 다 지나간 일인데 새삼……. 그리고 내 김밥 먹고 이렇게 잘 자라준 것이 너무 고맙지…….”
그러자 이번에는 연수가 말했다.
“김밥을 돈 안 받고 그냥 주실 줄은 몰랐어요. 몇 년이 지난 후에 그걸 알았거든요.”
나는 예전처럼 김밥 몇 줄을 썰어 그들 남매 앞에 내밀며 먹기를 권했다. 그들 남매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김밥을 잘 먹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요즘의 근황을 물었다.
“대학을 갈 처지가 되지 못해 고등학교만 졸업을 했지요, 그리고 몇 년 동안 공무원시험 공부에 매진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 남매 둘이 올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며칠 전에 첫 출근을 했어요.
그래서 저희들 일생에 제일 생각나는 어른들을 찾아뵙자며 오늘 처음 나선 길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고 목구멍에서는 큰 덩어리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깟 김밥 몇 줄을 나누어 준 것밖에는 없는데 일생에 제일 생각나는 사람이라니……. 나는 그들 남매의 마음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니 너무 고마워 눈물이 핑 돌기에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부모님은…….”
내 물음에 남매는 서로 마주보더니 크게 한숨을 쉬고 결심이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계시고 엄마는 지금 함께 살고 있어요.”
나는 아버지의 일을 더 묻고 싶었으나 남매의 심정을 이해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김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맛이 있네요.”
“왜, 예전처럼 좀 싸줄까?”
내 말에 우리 셋은 가게가 떠나가도록 웃었다. 그들과 지난 이야기로 장단을 맞추다보니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남매는 자주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우리 김밥 집을 나섰다. 나는 돌아가는 남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영원히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그러면서 오늘같이 보람 있는 하루가 연일 계속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살기 좋을까 생각해봤다.
김밥집의 바쁜 저녁시간이 끝나고 나도 김밥 한 줄로 저녁을 때웠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 낮에 다녀간 남매의 어릴 적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10년도 넘은 어느 여름날, 무더위가 시작되자 학교마다 방학을 맞았다. 이런 더위에는 김밥장사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김밥 속에 든 야채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여름만 되면 위생과 기온에 무척 민감하다. 괜히 우리 집에서 사다 먹은 음식으로 식중독이라도 걸렸다면 여간 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던 어느 한여름의 점심때였다. 가게 안에서 일을 하다 보니 밖에서 어린이 둘이 가게로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열며 물었다.
“너희들, 김밥 사러왔니?”
그러자 애들은 호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내 앞에 내밀며 물었다.
“이걸로 김밥 살 수 있어요?”
그 애들이 내미는 카드를 받고 보니 교육청에서 생활보호대상자인 초등학생에 방학 때만 점심 급식용으로 발급해주던 카드였다.
학교급식이 시작되던 초창기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제외하곤 무료급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결손가정은 방학 때 아이들이 학교에서 급식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육당국에서는 그런 생활보호 대상자에 방학 때 가맹점을 방문해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카드를 발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 김밥 가게는 그 카드를 받을 수 있는 가맹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남매를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 때 내 머리는 전광석화로 돌고 있었다.
‘어린 것들이 얼마나 김밥이 먹고 싶었으면…….’
순간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왔다.
“김밥을 줄 수는 있는데 대신 여기서 먹고 가야 한다.”
나는 현재 아이들의 생활이 어떤 상태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나는 카드를 받아 김밥 값을 계산하는 척하고는 아이들에 물었다.
“그래, 엄마 아빠는 뭐하시고 너희 둘이 김밥을 사먹니?”
내 물음에 아이들은 머뭇머뭇 하더니 누나가 대답했다.
“엄마는 아빠가 술만 잡수시면 때려서 집을 나가시고 아버지는 집 짓는데 일 다니셔요. 그래서 아침도 라면을 끓여먹고 학교에 가요.”
남매의 얘기를 들은 나는 애들 집안 사정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가 없는 애들은 먹고, 입는 것이 부실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아는 교육당국에서도 방학 중 아이들의 점심을 위해 카드를 발급했던 것이 아니던가? 남매가 내민 카드로 결재할 수 없었으나 결재한 것처럼 위장하고 남매에게 김밥을 썰어 가게 안에서 먹게 했으니 나름 엄마의 마음이었다.
“김밥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카드 가지고 와서 먹고 가거라.”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들 남매는 우리 가게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매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었다. 거기다 엄마가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리다 못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늘 그들의 끼니를 챙겨주곤 했다.
“오늘 아침은 먹었니? 저녁은?”
저녁을 어찌하겠냐는 물음에 남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때마다 저녁이 되면 먹으라고 김밥을 두 줄씩 더 싸주기까지 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울수록 착한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단다.”
그렇게 그 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동안 겨우 김밥 몇 줄로 남매를 보살폈는데 얼마 후 전학을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김밥 집을 찾아온 남매를 보니 그때 일이 헛된 일이 아닌 보람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남매 둘 다 그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출근을 한다니 내가 거기에 일조를 한 것이리라. 이렇듯 우리가 사는 주위에는 어려운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그 때 우리 어른이 각자의 위치에서, 나눔 활동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명랑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