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긴 작별을 했다. 허리디스크로 고생은 하셨어도 별다른 속병 없이 건강하셨는데 가신다는 말씀도 없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별 앞에서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후 본가로 돌아오자, 아버지의 손때 가득한 유품들이 집안을 덩그러니 채우고 있었다. 유품들 하나하나를 살피며 아버지가 살아오신 흔적들을 돌아보았다. 최소 10년에서 40년 이상 써온 물건들이었다. 최근에 구입한 새 신발이나 새 옷 같은 건 없었다. 창고에도 아버지가 주워서 수리해 놓은 물건들이 새로 쓰일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무뚝뚝하고 권위주의적이었던 아버지는 돈에 대해서만큼은 한없이 인색하고 예민한 분이었다. 아버지의 돈은 늘 과묵했고, 차가웠다. 가계부를 직접 쓰면서 단돈 몇 백 원, 몇 천 원 단위까지도 꼼꼼히 챙기셨던 아버지는 낭비하고 과소비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셨다.
과거 아버지는 어머니가 장보러 갈 때면 꼭 필요한 식재료를 살 돈만 내어주셨다. 냉장고에는 늘 필요한 만큼의 식재료만 들어있었고, 간식이나 여분의 먹거리는 애당초 채워지는 일이 없었다. 화장지 한 칸도 허투루 쓰면 혼이 났고, 치약 한 번 헤프게 쓰는 법이 없었다. 물은 항상 대야나 세면대에 받아서 사용했고, 변기물도 최대한 모아서 내렸다. TV도 정해진 시간이 아니고서는 보기 힘들었다. 여름에는 샤워를 할 때도 보일러를 못 틀게 하셨고, 겨울에도 집이 따뜻해진다 싶으면 곧바로 보일러를 끄고 돈이 줄줄 샌다며 잔소리를 하셨다. 이따금 도시락 통이나 실내화 등의 물건을 잃어버려 다시 사달라고 부탁하면 불같이 화를 내셨다. 심지어 생일 때는 자장면을 사달라고 조르다가 회초리로 맞은 적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돈을 타내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아버지가 가장 많이 한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아껴 써라! 백 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였다. 필요한 것을 산다고 돈을 달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습관처럼 3~4분가량 침묵하셨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금액보다 늘 적게 주셨다. 다른 부모님보다 적게 주시면서도 늘 아껴쓰라고 말씀하셨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번도 편히 돈을 주시지 않았던 아버지의 행동들이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서랍장을 뒤적이다가 아버지가 남기신 통장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악착같이 돈을 아끼며 살아온 흔적들이 적지 않은 돈으로 남아 있었다. 역시 아버지다웠다. 눈길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통장에 매달 고정적으로 찍힌 내역이었다. 세 군데의 단체로 매달 일정 금액이 자동 이체되고 있었다. 무슨 내역인지 궁금해 아버지가 직접 쓰셨던 가계부를 앞으로 돌려서 살펴보았는데, 금액도 3만원, 5만원, 10만원까지 다양했다. 의아한 마음에 단체 이름을 검색해 보니 세 군데 모두 아동후원 단체들이었다. 아버지는 아동후원 단체에 정기후원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물론, 당신에게 쓰는 돈조차도 인색하셨던 아버지가 오랫동안 정기후원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언제부터 후원을 해오셨는지 오랜 통장들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이미 20년쯤 전부터였다. 20년 전보다 더 전에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고아원에 돈을 보내신 기록도 남아있었다.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살면서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거나 기부를 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돈에 대해서 그렇게 인색하셨던 아버지는 꾸준히 후원을 해오고 계셨다. 부족한 형편이 아님에도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변변한 옷 한 벌 사지 못하셨고, 그럴듯한 식당 한 번 가신 적은 없으셨어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서는 꾸준히 마음을 쓰고 계셨다는 사실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또한 겉으로 드러내 자랑거리로 삼지도 않으신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아버지에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의 돈은 너무 따뜻했다. 오랜 시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은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우리들에게 아깝게 낭비하지 말고 아껴 써서 꼭 필요한 곳에 베풀라고 가르쳐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오랜 시간 해 오셨던 대로 형과 내가 아동단체들에 대한 정기후원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결정을 했다. 정기후원이야말로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기신 가장 값지고 위대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우리 형제가 정기후원을 지속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실 것만 같았다. 내 통장으로 자동후원을 설정하고 나니, 자식들 또래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일에 미력이나마 보탰다는 생각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내가 보낸 돈이 도움의 손길이 간절한 아이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간절했다. 아버지도 그런 뿌듯한 마음이셨을까. 일상적으로 무의미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 술 한 잔을 아껴 정기후원을 늘려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며칠 전 아버지가 잠드신 납골당에 다녀왔다. 영정 속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표정이 없으셨다. 하지만 아버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품속에 보물처럼 품고 갔던 정기후원 통장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며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들, 소중히 잘 쓰고 잘 이어가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세요!”라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