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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 머리 소년의 가르침
  • ['나의 나눔 실천 이야기' 수기 | 202307ㅣ글 문애진님ㅣ그림 박은지님]
나는 초등학교 시간강사이다. 교사가 결혼을 하거나 상을 당해서 출근을 못하는 경우에 학생들의 교육공백을 막기 위해 나와 같은 강사가 그 빈 자리를 메운다. 직업의 특성상 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여러 학교에서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교사들의 연이은 확진으로 나를 찾는 학교가 많아졌다. 어느 초등학교 6학년의 임시 담임으로 하루 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처음 방문하는 학교라 출근해서 계약서를 쓰고, 교실을 안내받았다.
마스크로 서로의 얼굴을 반쪽씩 가린 채 어색한 인사를 나눈 후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담임의 임무 중엔 학생들의 출결 확인도 있고, 하루 수업을 하더라도 학생들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주고 오는 것이 나만의 원칙이라 명부를 보며 한 명씩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학생 명부는 편의상 보통 앞쪽에 남학생, 뒤쪽에 여학생 이름이 적혀 있다. 남학생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보며 눈 맞춤을 하고 있는데, 긴 머리의 학생이 대답을 했다. 명부를 보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외모만 보면 영락없는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학생들도 내가 멈칫하는 것을 알아챘으나, 애써 모른 척 해주었다. 반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부른 후 1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태연한 척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그 학생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1교시를 마친 후 학생 몇몇이 책상 가까이 다가왔다. 보통의 아이들은 처음 본 선생님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다. 익숙한 일이라 다가온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2교시 마친 후에도 학생들은 내 곁에 와서 재잘거렸고, 마침 머리가 긴 그 남학생도 가까이 있어서 슬쩍 질문을 했다.
“OOO은 왜 머리가 엄청 길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야?” “머리카락 기부하려구요.” “누구한테 기부하는데?” “암에 걸린 아이들한테요. 암 치료하면 머리카락이 다 빠진대요. 가발 만들어서 그 아이들한테 보내준대요.”
“주위에서 기부하는 사람이 있었니? “아빠가 자주 헌혈하시는데, 저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린이는 안 된다고 해서 아쉬웠어요. 검색하다가 머리카락 기부를 알게 되었어요. 그 날부터 기르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잘랐어요. 방학하면 잘라서 기부하려구요.”
“선생님은 네가 머리가 길어서 처음엔 여학생인 줄 알았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이 오해해요. 근데 전 신경 안 써요.”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그 아이가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오늘 만난 그 학생 생각이 났다. 어린 나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고 있었다. 시간을 내어 봉사활동을 할 수도, 헌혈을 할 수도 있는 어른이지만,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인터넷 검색창에 ‘머리카락 기부’를 입력해보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소중히 기른 머리카락을 좋은 일에 쓰고 있었다. 후기를 하나씩 읽어보고, 나도 이 일에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좋은 머릿결을 갖기 위해 단백질도 잘 챙겨먹고, 하루에 한 번씩 빗질도 했다. 파마와 염색도 당분간 하지 않았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25cm이상 길이가 필요하다. 기다림의 시간 끝에 어느덧 어깨를 지나 등을 덮는 길이가 되었다. 미용실에 고무줄과 30cm 자, 비닐을 준비해갔다. 가방에서 준비물을 꺼내 미용사에게 건넸다. 25cm이상의 길이로 고무줄을 묶고, 위쪽을 자를 것을 주문했다. 길이가 모자라지 않도록 미용사도 신중하게 잘랐다. “서걱서걱, 싹둑!”
짧아진 머리가 어색해서 자꾸 손이 머리로 갔다. 하지만 짧아진 머리만큼,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내 손엔 2021년 4월 29일, 2023년 1월 31일 날짜가 찍힌 모발 기부증서가 있다. ‘소아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따뜻한 기부를 증명합니다. 전해주신 마음은 어린이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행복한 꿈을 이루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나누는 일이 이토록 벅찬 일인 줄 나눔을 실천하고 알게 되었다. 큰 금액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훌륭하고 멋진 일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머리카락 나눔은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 머리를 기르는데 비록 2년 정도의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누군가를 위한 기다림은 오히려 설렌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러 교사로 갔던 그 날 나는 오히려 나눔의 삶을 배워온 학생이 되었다. 누구든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이든 나눌 수 있다. 오늘도 나는 그 배움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 또한 지식뿐만 아니라 나눔 또한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다. 수업 중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이나 ‘기부’와 관련된 것을 배울 때면 늘 그 남학생 이야기를 해준다. 선생님도 두 번이나 기부했다고 하면 학생들은 너도나도 자신도 머리를 길러서 기부를 하겠다고 한다. 한 남학생의 용기 있는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선한 영향력의 날갯짓이 퍼져나간다. 그 날갯짓은 처음엔 작았을지 모르나 이후에는 커다란 태풍을 만들 만큼 강력해질 것이다. 나눔의 태풍은 더불어 가는 이 세상을 더욱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