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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화학교, 그 일곱번의 사랑
  • ['나의 나눔 실천 이야기' 수기 | 202307ㅣ글 허가은님ㅣ그림 백승혜님]
우리 가족은 남편 학업 차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물결치던 삶의 한자락을 잡아주고, 단단히 뿌리 내리게 한 10여 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해야 했다. 미국에 도착해서 한동안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퇴사를 할 수밖에 없음이 속상했고, 이대로 경력단절이 되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타국에서 제한된 신분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한글도 완벽히 구사하지 못하는 그들이 부딪쳐야 하는 낯선 언어와 환경은 매일 아침 눈물 전쟁을 불러왔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나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는 점점 더 번져가는 슬픔을 느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아주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한국문화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라고 했다. 우리가 거주하던 동네는 작지만 한글과 한국문화에 관심이 높은 곳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한국문화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첫째 아이는 가장 어린 반에 입학해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함께 집을 나섰다. 서투른 첫 수업을 준비하며 마음에 내려앉은 떨림을 숨길 수 없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처음이었고, 교재는 있어도 그 외 프로그램은 오롯이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찬바람이 불던 1월의 첫 금요일. 고요한 교실에서 반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때‘안녕하세요’를 외치던 청명한 목소리와 반짝 빛을 일구던 눈동자가 나를 안도케 했다. 우리 반은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대부부분이었는데, 그중에는 한글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매주 앉아서 한글을 쓰고 읽어야 하는 시간이 힘든 아이도 있었다. 하루는 교실에서 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도 모르면 어떡해. 여기 이 글자도 틀렸잖아.” “틀릴 수도 있지. 고치면 되는 거 아니야?” “이건 쉬운 거잖아!”
짝지어 글을 쓰는 수업 중, 반에서 가장 잘 하는 OO이가 아직 서툰 ☆☆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OO이는 평소에도 이런 상황이 종종 있었는데, 간혹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듣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든지, 글자를 띄엄띄엄 읽는 친구에게는 ‘이건 너무 쉬운 건데’라며 상처를 주곤 했다. 그는 선하고 따뜻했지만 ‘한글’에서만큼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오랜 상담을 통해 그건 마음속에 자리한 ‘결핍’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친구의 부재, 그리고 네 명의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부담감을 ‘한글’로 인정받고자 했다. OO이에게는 한국문화학교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게 하는 고유한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이 시간에 온 정성을 쏟으리라 다짐했다.
한글학교에서의 첫 종강을 앞둔 날에는 ☆☆이가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다음 학기부터는 그만 다니고 싶어요.” “왜? 어떤 이유 때문에 그래?” “동생들이랑 함께 공부하는 것도 창피하고, 배워도 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는 한글을 배운지 얼마 안 돼 자신보다 한 학년, 또는 두 학년 낮은 동생들과 배우는 중이었다. “☆☆아, 처음 왔을 때 기억나?” “네..” “이전 선생님께 들으니 그때는 자음 모음도 전혀 몰랐다고 하시던데, 지금은 어떠니? 혼자 책도 읽고 글도 쓸 수 있잖아.” ☆☆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낮은 그늘이 어룽졌다.
“그래도 아직 동생들보다 못하잖아요. 어렵기도 하고요.” “선생님이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안다는 건 이름을 붙이는 일이래. 그러니까 ☆☆이는 배우는 모든 한글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거나 다름없어.”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시선을 두었다. “제가요?
“응, 선생님은 ☆☆이와 친구들이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우리 꼭 졸업 때까지 함께 하자.” 나는 3년 반, 일곱 번의 학기 동안 한국문화학교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했다. 물론 OO이와 ☆☆이도 함께였다. 귀국 전 마지막 수업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말 한마디와 작은 움직임에도 지금까지의 추억이 고스란히 딸려왔다. 한국문화학교에서 맑은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인자한 선생님들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그리고 매주 수업을 준비하는 긴장과 고민의 과정이 없었다면, 나는 이만큼 행복할 수 없었을 거라고 고백했다. 부족한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매주 금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열심을 다하고 싶었다. 낯선 서로를 알아가며 친밀해지는 과정이 좋았고, 조금씩 향상되는 한글로 고운 마음을 담아줘서 행복했다.
며칠 전, 떠나는 내 손에 들려줬던 OO이의 카드를 다시 펼치며, 꾹국 눌러 담은 그녀의 온기가 여전히 우리를 이어준다는 생각을 했다. 『□□ 성생님한태. □□성생님, 이번 한글학교 정말 좋은 성생이었어서 감사함니다. 학기가 끈나는게슬퍼요. 성생님가 헤어지는것도 슬퍼요. 그래도 한국에서 봐요!』
나는 가끔 상상한다. 훌쩍 자란 아이들과 한국 어딘가에서 마주 앉아 웃는 그날을. 그리고 기억해야지. 한글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우리가 함께한 일곱 번의 학기는 사랑이자 위로였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