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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사는 맛, 사람 사는 세상
  • ['나의 나눔 실천 이야기' 수기 | 202307ㅣ글 김경희님ㅣ그림 정선영님]
“아버님, 내일 저녁 식사 기억하시죠?” “아이~ 안 가~” 안간다는 대답과는 달리 어르신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제가 벌써 장도 다 봤는데 안 오시면 큰일나요.” “자기네들이나 맛있게 먹어. 나는 먹은 걸로 하면 되지 뭐.” 쌩하니 자리를 뜨시는 어르신께 나는 큰소리로 상기시켜드렸다. “내일 6시입니다. 안 오시면 모시러 갈 거에요.”
다음 날 오후, 압력밥솥으로 영양밥을 짓고, 갖은 재료로 된장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고, 짜지 않게 나물을 무치고, 유정란 계란찜과 유기농 쌈채소 샐러드, 손수 담근 얼갈이 배추김치, 수제 요거트 후식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어르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늘 타고 다니시는 1인용 전동차 소리가 들리나 귀를 세웠지만 잠잠하였다. 그래서 차로 모시러 갔다. 차 한대가 지나갈 너비의 길을 따라 길다랗게 늘어진 마을에서 어르신의 댁은 입구 쪽, 우리집은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한사코 거절하시는 걸 보니, 혹시나 했던 우려대로 역시나 부담이 되셨던가 보다. 이제 방법은 하나! 식탁에 차렸던 음식을 종류대로 포장해서 배달하였다.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
이 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댁에서 내다보이는 산골짜기 양지 녘에 산소를 마련하여 매일 돌보시는 홀로어르신. 친정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해서인지 어르신을 뵈면 다섯 해 전에 별세하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내 마음에 그리움이 피어날 때, 나는 음식을 만들고 어르신을 찾아뵙는다.
“집에 우두커니 앉았으려니 어찌나 심심한지, 그래서 나왔어.” “아유, 어머님.. 그러셨어요? 오늘은 제가 말동무 해드릴게요.” 아침 비닐하우스 작업을 마치고 오는 길에, 마을회관 앞에서 빨간벽돌집 어르신을 만났다. 남편과 사별한 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빈자리가 갈수록 더 허전하시다는 어머님이다. 나를 보시더니,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먼 산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반색을 하셨다. 두런두런 이야기꽃이 피어올랐다. 마을에는 홀로 사시는 어머님들이 여럿 되신다. 자녀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도로포장이 된 게 불과 15년 전이라니, 깡깡 시골에서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등골이 휘었다는 말씀이 실감이 난다.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공하여 가정을 이룬 자녀들이 모시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혼자 사시는 것은 고향을 떠나기 싫은 이유 때문이다.
구십칠세의 어머님이 꽃길 사이에 소복이 자라난 잡초를 호미로 뽑고 계신다. 이 잡초가 눈에 밟혀서 밤잠을 설쳤다는 말씀에 깜짝 놀란 나는, 그 곁에서 한참이나 노닥노닥한다. 두건이 벗겨지는 지도 모르고 밭일에 열중하시는 우물 뒷집 어머님께 다가간다. 분명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좀 쉬었다 하세요.” 관절에 좋다는 개복숭아 음료를 건네며 나도 엉덩이 의자를 걸친다.
아직 싸아한 공기에도 따뜻한 햇볕을 쬐러 마실 나오신 앞집 어머님의 보행기를 고정시키고, 나도 그 옆에 쪼그려 앉는다. “잘 놀았네. 바쁜데 어여 들어가.” 하실 때까지. 같은 말이 반복되는 대화일지라도 어머님의 적적함이 달래진다면, 나는 기꺼이 걸음을 멈출 것이다. 봄이 왔다.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을 보낸 탓에 봄의 전령사로 고개를 내민 쑥을 보았을 때,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열심히 쑥을 캐기 시작했다. 해발 300고지 청정지역의 공기를 마시며 자란 쑥이다. 큰 키로 자랐을 때는 칼 대신 가위를 사용했다. ‘캤다’기보다는 ‘잘랐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렇게 포대에 담긴 쑥을 가리고, 씻고, 삶고, 덩이를 만드는 과정을 거친 후, 떡방앗간에서 절편이 되어 나왔다.
마을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신다는 쑥절편을 작년에는 이사떡으로, 올해는 봄인사떡으로 돌렸다. “제가 저기 대추밭 아래서 직접 뜯은 거에요.”를 강조하면서. “뭘 이런 걸 다…”, “나도 젊었을 때는 많이 해먹었는데…” 떡이 담긴 도시락을 받으면서 내 손도 꼭 잡아주셨다.
어느 날이었다. 우리동네의 사랑방, 연꽃 연못가 마을 정자에 남자어르신 세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마침 출출해질 시간이라 급히 냉동실에 얼려 둔 쑥절편을 들기름에 노릇노릇 굽고, 양파즙과 견과류 등을 주전부리로 챙겼다. 마루 위에 펴놓으니 제법 한상차림이 되었다. 한 어르신이 “어이구, 푸짐하네. 이걸로 저녁 해야 되겄어.” 하신다.
며칠 전 감기를 앓으시면서 수척해지셨다. 가뜩이나 식사 준비하기가 수월치 않으신 홀로어르신으로, 감기에 걸렸으니 오죽하시랴. 그래서 버섯야채죽을 좀 쑤어드렸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또 하신다. 담소가 무르익을 즈음, 노인회장님께서 지나시던 걸음을 멈추고 합석하셨다. 항암치료중이시다. 입맛을 잃고 기력이 쇠하여 활동성이 많이 떨어지셨다. 본인의 건강을 살피기에도 여력이 없는데 사모님이 우울증으로 오래 투병중이어서 근심이 크시다. 그런데 쑥절편을 보시더니 그것이 마치 원기회복의 명약이라도 되는 듯 맛있게 드시는 게 아닌가. 포크도 마다하고 “그냥 손으로 먹지.” 하시면서. 우리집에 아직 얼마간 남았을 텐데, 따로 더 챙겨드려야겠다. 약간이라도 기력보충제가 된다면 참 좋겠다. 내년 봄에도, 후년 봄에도, 내후년 봄에도, 나는 쑥을 캐고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마을에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 어르신들의 표정이 맑고 밝아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사를 하면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신다. 게다가 “어디 가?”, “며칠 안보이던데 어디 댕겨 왔어?” 안부를 물으시기도 하고, “이따가 비 온대. 천둥 번개도 친다는구만.” 정보를 주시기도 하고, “우리 밭에 심어 놓은 앵두나무 있잖여, 앵두가 잘 열렸어. 맘대로 따먹어.” 재산도 나눠주신다.
일 년 전, 이사하던 날이 떠오른다. 시골 경험이라고는 유년 시절 방학 때 외가를 방문했던 게 고작인 나로서는, 귀농을 하겠다는 남편을 따라 오면서 심경이 복잡했다. 이 곳은 속리산 둘레길 4구간을 끼고 천혜의 자연과 함께 하는 예쁘고 아담한 마을이지만,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하는 불편함이 컸다. 또한 연고가 없는 이 곳에 정붙여 살 수 있을지 염려도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마을 어르신들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고 자라셨거나, 산넘고 물건너 시집오셨거나, 다른 마을에서 이사를 오셨거나, 출발은 달랐어도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로 여기는 분들에게 이 곳은 같은 고향이었다. 팔순, 구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호미 들 힘만 있어도 밭을 매고, 굽은 허리에도 걸을 힘만 있으면 좁은 논둑길을 오가며 농사일을 추리는 어르신들.
가까이서 뵙는 동안, 나의 인생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의 고향이 될지도 모르는 이 곳에서 나는 딸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밥상을 차리면서 숟가락 하나 더 놓고, 편찮으시다면 수프나 죽 등의 유동식을 만들어드리고, 떠먹는 수제 요구르트는 간식용으로 상시 준비해 두고, 병원행차 때는 읍내로 모셔드리고, 말벗이 되어 삶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때로는 깜짝 방문을 한다.
‘어머님! 어버님!’ 호칭도 참 자연스러워졌다. 딸노릇을 마음 먹고 일년 여를 넘기는 사이, 어쩌면 피를 나눈 가족 못지 않게 마음이 통하는 가족이 된 것 같다. 내놓기에 부끄러울 만큼 소박하고 작은 섬김이지만, 그것이 맺어준 거대한 가족이다. 이 새로운 가족으로 인해 나는 요즈음, 새로운 행복을 맛보고 있다. 이 맛이 사람 사는 맛이고, 이런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