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이 부리는 날의 연속이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지고 있지만, 더위로 지친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점심시간을 쪼개 나온 외출인지라 빠른 걸음으로 건물로 들어서고 싶었다. 나의 마음과 다르게 바닥의 열기가 고스란히 담아 발목을 붙잡는 것만 같았다. 혼자 다녀와도 되는 것을 굿이 따라온다고 한 동료 직원의 표정에는 후회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게, 나 혼자 다녀온다고 했잖아.”
“그러게, 나 혼자 다녀온다고 했잖아.”
그는 나의 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손사래만 쳐대다가 건물의 입구가 보이자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졌다. 멀리서 보면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결승선을 끊고 들어가는 영광의 모습처럼 그가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그의 뒤를 따라 건물 안에 들어서니 입구에 비치된 정수기를 붙들고 늘어져 있는 그가 보였다. 어린 시절 체육 시간이 마치면 땀 범벅이 되어 수돗가의 즐비여서 있는 수도꼭지에 매달려 물을 부어 마시던 학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정수기 옆에 매달린 일회용 컵 크기가 성에 차지 않는지 몇 번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야 그는 나를 찾았다.
“와. 우리나라가 열대기후로 변한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시간 없어. 번호표부터 뽑아야지. 빨리 마치고 돌아가야 커피라도 한잔 마실 시간이 남지.”
그를 재촉해 건물 내 번호표 발급기에 달린 작은 종이를 뽑아 들었다.
“띵동”
운전면허시험장에 꽉 채운 대기석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평일 오전을 이용해서 방문하면 시간 여유가 넉넉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위를 피해 앉아있는 사람들과 운전면허 시험을 학원이 아닌 시험장을 통해 직접 시험 응시하는 응시자까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갱신을 하기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기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름 매너 운전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기에 초보 시절 벽에 대고 홀로 차를 찌그러트리는 황당한 사고만 있었을 뿐 작은 접촉사고도 없던 나는 어느새 녹색면허라 불리는 승급자로 분류가 되어있었다. 간단한 신체검사를 마치고 다시 대기 번호표를 발급받았다. 멀리 대기석을 바라보니 아이스 커피로 체력 충전하고 있는 동기가 보였다. 생각보다 빠른 진행으로 1종 운전면허증이 내 손에 쥐어졌다.
“대박.”
동료의 탄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깜짝이야. 인기척이라도 좀 하지.”
“인마.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인기척까지 내야겠냐? 그나저나 너?”
그는 나의 운전면허증을 바라보고 있었다. 1종 면허로 적혀있는 글자보다 그 아래 새겨있는 장기기증 스티커에서 그의 시선은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1980년대만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은 아파트에 사는 ‘아파트 키즈’라 불리던 아이들보다 단독주택 골목에서 소리 내 놀던 아이들이 훨씬 많던 곳이었다. 엄마가 외출로 늦거나 급한 일로 집을 비우면 아무렇지도 않게 옆집 밥상에 함께 앉아 끼니를 때우던 정 넘치는 곳이었다. 특히 옆방 아주머니는 엄마와 자매처럼 지낼 정도였다. 하교 후에 엄마는 옆방 아니면 아주머니와 우리 집 안방에서 늘 함께였었다.
당시 아주머니는 마흔이 넘은 나이였을 텐데 아이가 없었다. 주변 어른들의 안타까운 눈빛과 용기를 주는 말을 그 당시의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주머니가 아이가 없는 것이 더 좋았다. 아주머니는 어린 나에게는 꿈꿔오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나의 친엄마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는 가짜 엄마를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리라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나에게 옆방 아줌마는 한없이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혼이 날 때도 아줌마는 나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고, 먹고 싶은 간식도 동전 100원 하나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의 눈길을 피해 몰래 놀이터에서 나눠 먹어주기도 했다.
그런 아줌마가 어느 날부터 몸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건강을 우려하는 마음과 임신일까 싶은 희망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아기가 생기면 동생이 생기는 것처럼 좋은거라 생각했다. 아줌마와 나의 사이가 부러웠던 언니가 잔뜩 샘이 나던 날이었다.
“너 아줌마 아이 생기면 너 따위 쳐다도 안 볼걸?”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줌마도 기다리던 임신이길 바라며 마음으로 들떠있는 것이 보였다.
“난 아기 싫어. 아기가 생기면 아기랑 아줌마랑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어.”
방문 앞에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날은 아줌마도 그 누구도 엄마의 회초리를 막아주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아줌마는 점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했다. 큰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야 만성신부전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생소하게 들리던 신장 투석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줌마는 주변의 도움으로 열심히 운동과 몸 관리를 했다. 내가 못된 말을 해서 아줌마가 큰 병을 얻은 것만 같아 남모르게 많이 울었다.
몇 년 후 다행히도 아줌마에게 신장 기증자가 나타났다. 조금은 자란 나는 아줌마가 수술하러 가는 날에 펑펑 울었다. 그날 아줌마의 손길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따스한 손길이었다.
동기는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히 녀석의 성격이라면 재촉이며 여러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평소와 달리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휴. 나는 쫄보라 기증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용기를 내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진중한 그가 어색한 나머지 오묘한 표정의 나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이내 농담을 던졌다.
“그나저나 언제 돌아가냐. 괜히 따라온다고 했네. 아이스커피나 한잔 사라.”
그는 실내 한 편에 자리 잡은 커피숍으로 앞장섰다.
그를 따라가며 운전면허증 아래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장기기증 스티커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단순 인쇄되어있는 로고에 마음이 일렁였다.
저도 이젠 누군가에게 생명을 나누어 준다는 마음을 알게 된 어른이 되었다고 아주머니께 알려드리고 싶었다. 말로 전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겠다. 운전면허증 작은 스티커처럼 아주머니에게 불어넣어 준 감사한 생명처럼 나 역시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 있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